본보 홍권희기자 '아프간 난민촌 참상' 르포

  • 입력 2001년 9월 29일 17시 47분


“먹지 못해도 이곳은 죽음의 공포는 없으니 다행이지요.”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천신만고 끝에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 난민촌에 들어온 누르 비비(여)는 29일 부르카로 얼굴을 가린 채 힘없는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했다.

▼돈주고 닫힌 국경선 넘어▼

가족들과 함께 카불을 떠난 그녀는 버스를 두번 갈아타고 파키스탄 국경인 토르크함에 도착했으나 굳게 닫힌 국경 문을 보고는 낙심해 주저앉고 말았다. 며칠을 기다리다 파키스탄 경비대원에게 1인당 400 파키스탄 루피(약 8000원)씩을 바친 뒤 겨우 국경을 넘었다.

비비 가족이 찾아간 곳은 페샤와르의 잘로자이 난민수용소 87구역.

“새로 온 사람들은 대부분 천막도 담요도 없어요. 지원소에 등록도 못해 식량이나 연료 배급도 못 받아요. 곰팡이가 핀 빵을 뜨거운 물로 풀어 만든 죽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어요.”

사진 찍는 것은 한사코 거부하던 그녀는 기자와 대화하는 것을 보고 몰려드는 다른 난민들의 모습에 놀란 듯 급히 자리를 떴다.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4개월 전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관계자의 안내로 천막촌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안타깝게 지원을 호소하던 눈빛은 찾을 수가 없었다. ‘왜 우리 고향을 공격하려고 하느냐’는 분노의 눈빛만이 따가웠다. 서방에서 온 몇몇 기자들은 난민들이 돌을 던지는 바람에 놀라 도망치곤 했다.

아프가니스탄 집권 탈레반의 거점인 칸다하르에서 파키스탄의 퀘타로 이어지는 길은 픽업트럭, 중국제 오토바이, 자전거, 나귀가 끄는 수레 등으로 혼잡하다. 이렇게 모여든 1만여명의 난민들은 국경 차만에서 발이 묶였다. 이곳에서 출산한 두 명의 여인은 파키스탄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하루 만에 퇴원해 다시 아프가니스탄 땅으로 보내졌다.

▼수용한계 넘어 배급 부족▼

국경 차만 주변의 대기자들 중 절반이 노숙을 하고 있다. 식수와 음식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밤에는 사막의 추위와 싸워야 한다. 이번 주부터는 설사병이 돌아 어린아이 몇 명이 끝내 숨을 거둬 난민들과 유엔 당국자들이 초긴장 상태다.

난민 가운데 산양떼나 다니던 험악한 산길을 타고 국경을 넘어 페샤와르 퀘타 등지로 몰래 들어온 사람도 10만명은 넘는다고 현지 주민들은 전했다. 퀘타 시내까지 잠입했다가 경찰에 적발돼 픽업트럭에 실려 국경 밖으로 추방된 사람도 부지기수다.

▼밀입국자만 10만여명선▼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유엔아동기금(UNICEF) 등 2개 유엔 구호기관들은 29일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을 위한 비상 구호작전에 나섰다.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에게 줄 구호품을 실은 수송기가 29일 파키스탄에 도착했으며 천막 2000개, 이부자리 6000개, 주방용기 2000세트, 양동이 4000개를 이웃 나라들로 피신한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위해 이슬라마바드에서 퀘타로 옮겨졌다.

유엔은 ‘이미 200만명의 난민이 들어와 있어 더 이상은 곤란하다’며 거부하던 파키스탄을 설득해 국경 근처에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난민촌 100곳을 지을 계획이다. 잘로자이 난민촌 한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있던 하지 아야툴라(37)는 “겨울이 다가오는데 혹독한 산악 추위에 고향 사람들이 잘 버틸까 걱정”이라고 표정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페샤와르·퀘타〓홍권희기자>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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