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테러 대참사]뉴욕-워싱턴 현지표정

  • 입력 2001년 9월 14일 19시 49분


◆뉴욕=병원 벽마다 실종자 사진 ‘빼곡’

“제 아내를 본 사람 없나요? 금발머리에 하얀 블라우스 차림이었는데….”

웃고 있는 아내의 사진을 들고 애타게 소식을 찾아 헤매는 브라이언 골드버그의 얼굴은 며칠째 깎지 못한 수염으로 더부룩했다.

13일 오후 (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11번가 그리니치 빌리지에 자리잡은 성 빈센트병원에는 실종된 가족이나 친구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손에는 사진과 휴대전화, 물병을 들고 있었으며 대부분 간편한 옷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아이들한테는 엄마는 회사 일 때문에 집에 오지 않았다고 했어요. 상처를 줄 수 없어서요. 아내는 돌아올 겁니다. 꼭….”

골드버그씨의 말을 뒤로 하고 병원에 들어서자 1층 벽에는 실종자 사진과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가 빈틈없이 붙여져 있었다. 방송사 차량에도 카메라가 한번쯤 찍어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붙여놓은 사진으로 가득했다.

애타게 찾아 헤매는 가족과 친구들의 수심 가득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사진 속의 실종자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11일 전’과 ‘11일 후’로 나뉘어 있었다. 이들에게는 11일을 경계로 천지가 뒤바뀐 것과 다름없었다.

세계무역센터 94층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서 일하던 동생 이본 보노모를 찾는 여성은 “병원을 샅샅이 찾아다니고 인터넷 사이트를 모두 뒤졌지만 헛수고였다”며 “어떤 소식이라도 좋으니 동생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면 꼭 연락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남편 모이시스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엘리자베스 리바스는 “남편이 그날 아침 9시 2분에 전화로 ‘괜찮다, 당신을 영원히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그게 마지막일 줄이야…”하며 눈물을 흘렸다.

병원마다 자원봉사자로 붐볐다. 의사 간호사 의대생은 물론 인도에서 온 수녀, 퀸스에 사는 대만인 컴퓨터 프로그래머 등등. “뭐든 도와주고 싶다” “기술은 없지만 도울 수 있는 손은 있다”는 게 이들의 말이다.

자원봉사자들은 실종자 가족 연락처를 정리해 시내 병원에 보내주거나 실종자 가족에게 커피와 샌드위치를 권하며 위로했다. 뉴욕혈액센터는 이날 더 이상 헌혈이 필요 없을 만큼 충분한 혈액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이 병원 레오나드 바칼슈크 박사는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실종자 가족을 위로했다.

“무너진 건물 밑에 깔려 있다 해도 화상을 입지 않고 큰 부상이 없다면 5∼7일은 견딜 수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우리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뉴욕〓김순덕기자>yuri@donga.com

◆워싱턴 표정=군용차에 손 흔들며 "미국만세"

13일 오후 3시반경(현지시간) 지하철이 ‘펜타곤(국방부 청사)역’ 구내에 들어서자 ‘펜타곤 출입증 소지자만 내리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모른 체 하고 내렸으나 경찰관이 다가와 펜타곤 근무자가 아니란 것을 확인하고는 다음 열차를 타라고 말했다.

다음 역인 ‘펜타곤시티’에서 해군장교를 따라 내린 다음 펜타곤 1차 출입통제선을 지나 남쪽 주차장까지 갔지만 경찰의 제지로 되돌아와야 했다. 인접한 메리어트 레지던트 호텔 17층에 올라가 펜타곤을 내려다보니 5각형 건물의 한 변에 해당하는 곳이 시커멓게 그을린 모습이었다. 잔해를 치우는 트럭과 구조대원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주변 사무실, 백화점, 호텔은 이틀 전 끔찍한 테러가 일어난 도시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했다. 백악관 주위는 한 블록 정도 도로만 통제하고 있었다. 백악관 통제선 바로 앞 노천 카페는 담소를 즐기는 사람들로 빈자리가 없었다. 핫팬츠 차림의 여성들은 조깅을 하면서 경비 경찰관에게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워싱턴 시민은 만나는 사람마다 테러를 강력히 응징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때 피가 모자라 헌혈을 당부했던 미국적십자사는 시민들의 호응으로 이제는 더 이상 헌혈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알렸다.

워싱턴의 주요 건물은 조기를 게양했다. 상당수 버스와 승용차도 조기를 달았다. 지나가는 군용차를 향해 손을 흔들며 ‘미국 만세’를 외치던 한 중년 남성은 “테러리스트들은 자유를 약점으로 생각하지만 우리는 강하다”고 말했다.

‘얼굴 없는 테러’로 엄청난 피해를 당한 미국인은 차분한 모습 속에 테러 응징의 결연한 의지를 감춘 채 복수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워싱턴〓송상근기자>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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