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대륙]블라디보스토크에 中상인 몰린다

  • 입력 2000년 9월 4일 19시 14분


《블라디보스토크란 지명은 ‘보스토크(동방)’와 ‘블라디(정복한다)’의 합성어다. 19세기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시베리아를 건너온 러시아 제국의 패기가 담겨있는 지명이다.

소련 당국은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있는 이곳을 외국인 출입금지지역으로 못박아 장막 속에 가두었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된 뒤 블라디보스토크의 운명도 바뀌었다. 92년 외국인의 관광뿐만 아니라 외국기업의 투자와 기업활동까지 허용됐다. 그 뒤 유럽 스타일의 건물과 트람바이(전차), 고풍스러운 항구의 모습이 어우러진 블라디보스토크는 ‘국제도시’로 변모했다.》

현재 한국 미국 일본 등 5개국의 총영사관이 있고 중국도 올해 안에 총영사관을 개설할계획이다. 러시아 극동(달니보스토크·연해주를 포함한 6개주)에는 이 밖에도 나홋카에 북한 총영사관이, 하바로프스크에 중국과 일본의 총영사관이 있다.

▼舊蘇 해체후 국제도시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대통령은 7월 극동을 방문했을 때 “수십년 내에 이 지역 주민들이 러시아어 대신 일본어나 중국어 한국어를 사용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러시아 쪽에서 보면 ‘극동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어있는 발언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 지역이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사는 ‘국제지역’이 될 가능성을 예상한 발언이기도 하다.

극동은 경제적으로는 모스크바에서 독립된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다. 이 지역의 교역과 투자의 주요 파트너는 모스크바를 비롯한 다른 러시아 지방이 아니라 중국 동북3성 및 한국 일본 미국 등 동북아 경제권이다.

자동차는 이 지역의 동북아 의존도를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척도다.

현재 연해주 차량 10대 중 8대가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일제. 러시아법으로는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차는 운행할 수 없으나 ‘현실’에 밀려 사실상 사문화됐다.

▼中 소비재 상권 장악▼

땅은 넓고 자원은 풍부하면서 인구가 적은 현실도 ‘국제화’를 부추기고 있었다. 남한 면적의 1.6배인 연해주의 인구는 228만명에 불과하다. 극동과 동시베리아를 합치면 한반도의 47배나 되지만 인구는 겨우 1721만명이다.

무주공산(無主空山)이다시피 한 이 지역으로 해마다 100여만명의 중국인들이 들어오고 있다.

상술이 뛰어난 중국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나홋카에 ‘중국시장’으로 불리는 대규모 도매시장을 이루고 값싼 소비재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블라디보스토크 무역관의 이광희(李光熙) 관장은 “한국 일본 미국에서 기술과 자본 상품이 들어오고 중국 북한은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중국이 저가 소비재와 농산물을 공급하는 대신 러시아는 자원을 대는 국제적 분업이 이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주로 수출이나 원자재 수입에 치중했던 한국기업들도 이제는 공장 설립 등 현지진출로 눈을 돌리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북동쪽에 있는 인구 7만여명의 소도시 아르촘. 95년 뉴맥스어패럴이 세운 봉제공장이 있다. 직원은 500여명.

▼한국기업 현지진출 저조▼

생산품을 전량 미국 등으로 수출하는 이 회사의 이용문(李用文) 상무는 “러시아의 미비한 세제와 금융제도 때문에 여전히 어려움은 있지만 1000루블(약 4만2000원) 정도의 싼 월급을 주는 러시아 직원들이 기술은 기대 이상”이라며 만족해했다.

이 상무는 “한국기업들이 여전히 사회주의체제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는 러시아에서 사업경험을 쌓으면 북한으로 진출할 때도 유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블라디보스토크·나홋카〓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경제특구 나홋카▼

블라디보스토크 남동쪽에 있는 인구 19만명의 항구도시 나홋카. 이곳에 경제특구인 나홋카 자유경제지대(FEZ)가 있다. FEZ는 나홋카시가 아닌 별도 행정위원회가 관할한다.

표트르 솔로만틴 행정위원회 발전국장은 “현재 327개 외국계 기업이 특구에서 각종 사업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그 중 한국 기업은 8개.

한국과 러시아 양국은 92년부터 100만평 규모로 나홋카 한러공단을 추진하기로 했다가 규모를 축소해 1차로 6만평을 건설할 예정이다. 행정위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한러공단 예정지를 찾았다. 그러나 예정지는 아직은 허허벌판. 공단이 들어설 것을 알리는 표지판은 물론 다른 땅과의 경계를 구별하는 말뚝조차 없었다. 양국은 작년 앞으로 6년내에 공단을 조성키로 합의했으나 현재 상황으로 보아서는 합의가 이뤄질지 지극히 불투명해 보인다.

한러공단에 입주할 업체는 생산제품의 50% 이상을 수출하면 세제상 혜택을 받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6월 러시아하원을 통과한 ‘자유경제지역에 관한 법’에서는 FEZ내의 기업이 20%이상만 수출하면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 한러공단 입주업체가 상대적으로 불리해졌다. 러시아 의회는 한러공단 설치 협정을 아직 비준하지도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한 한국 기업인은 “앞으로 한국기업의 북한 진출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되는 상황에서 성사 가능성도 불투명한 한러공단에 입주하기 위해 애를 쓸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나홋카〓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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