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리포트]손호철/민주주의의 결실 美전당대회

  • 입력 2000년 8월 2일 18시 40분


필라델피아는 미국 정치에 있어서 역사적인 도시입니다. 미국 헌법이 제정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필라델피아는 지금 조지 부시 전대통령의 아들인 조지 W 부시 텍사스 주지사를 내세워 8년 만에 백악관을 탈환하기 위한 공화당의 전당대회, 그리고 80년대 이후 역대 정부가 취해온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심화하고 있는 빈부격차 등 사회문제들에 대한 여러 사회단체들의 항의집회로 떠들썩합니다.

미국 시간으로 3일 부시 주지사의 후보 지명 수락 연설로 막을 내릴 이번 전당대회는 여론조사들이 보여주는 부시의 우위를 반영해 축제 분위기에서 치러지고 있습니다. 또 딱딱한 연설로 일반인들을 식상하게 했던 예년의 전당대회와는 달리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노력했고 ‘온정적 보수주의’라는 구호를 채택해 일반인들에게 다가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과는 달리 전당대회에 대한 일반유권자들의 관심은 멀기만 합니다. 물론 세계를 움직일 ‘세계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 전당대회답게 대의원수의 몇 배에 해당하는 1만5000여명의 취재진이 몰려 취재경쟁을 벌이고 있고 주요 방송들이 경쟁적으로 전당대회를 생중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시청률은 별로 높지 않습니다.

이처럼 전당대회에 대한 당원과 국민의 관심이 시들해진 것은 70년대 이후 예전과 같은 열띤 논쟁과 막판 뒤집기 등 극적 요소가 전당대회에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미국의 전당대회는 이미 정해진 후보를 형식적으로 추인하는 절차에 불과합니다. 어두웠던 군사독재 시절 대통령을 뽑던 우리의 ‘체육관 선거’와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당대회가 이렇게 돼 버린 것이 우리처럼 민주주의가 발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가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미국정치는 3김 정치와 같은 한국식의 사당(私黨)정치는 아니었습니다만 케네디가와 같은 정치 명문가와 엘리트들이 당의 후보 결정을 좌지우지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연합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막판 뒤집기 등 전당대회의 극적인 요소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반전운동과 신좌파운동이 한창이던 68년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 같은 비민주적인 후보 결정 과정 때문에 일반 당원들의 지지를 받은 반전주의자 후보가 소수 정치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은 참전주의자였던 험프리후보에게 패배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분노한 젊은 당원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시카고전당대회는 미국 정치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습니다. 놀란 민주당은 후보를 당원들이 직접 선출하는 예비선거제도를 도입하는 등 당의 개혁을 단행했고 공화당도 이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당내 민주주의가 활성화되자 각 주의 예비선거 과정에서 경선 결과가 속속 드러나게 됐고 따라서 전당대회는 형식적 절차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올해도 전당대회를 보기 위해 많은 여야의원이 미국을 찾고 있습니다만 우리 의원들이 정작 와서 봐야 할 것은 전당대회가 아니라 예비선거입니다.

물론 전당대회의 형식화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내 민주화가 가져다주는 불가피한 결과라면 그것은 충분히 감수해야 할 부작용입니다.

한편 우리의 경우 주요 정당들의 전당대회가 미국과 마찬가지로 형식적 추인 절차에 그치고 있고 당원과 국민의 무관심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인은 미국과는 정반대로 당내 민주주의의 부재로 후보들이 뻔히 위에서 낙점돼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정당사에 있어서 대통령후보를 놓고 벌어진 제대로 된 경선은 아마도 야당의 40대 기수들이 맞붙었던 71년 신민당 전당대회가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97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도 그런대로 제대로 된 경선을 했습니다만 이인제후보의 경선결과 불복이란 어이없는 반칙으로 그 의미가 퇴색된 바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도 민주당의 전당대회를 앞두고 최고위원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넘어서 다음 대선의 경우 여야가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진정한 경선을 전개함으로써 미국처럼 전당대회가 긍정적인 의미에서 형식적 추인절차가 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서강대교수·UCLA 교환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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