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평화회담 첫날]"돌아갈수 없는 다리 건넜다"

  • 입력 2000년 7월 12일 18시 55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이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유일한 길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11일 대통령 휴양소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함께 3자간 중동평화회담 개막사실을 알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어 “두 정상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오랜 적대관계를 끝낼 기회를 갖게 됐다”며 “두 정상이 역사적 순간을 붙잡을 것으로 믿는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회담에 참가한 각국 관리들은 “양측 이견이 워낙 커 부분적인 합의가 이번 회담의 가장 현실적인 대안일 것”으로 보고 있다고 뉴욕타임스지가 12일 보도했다.

이날 헬기로 회담장에 도착한 클린턴 대통령은 먼저 아라파트와 만나 35분간 밀담한 뒤 바라크와 45분간 만났다.

이후 클린턴 대통령은 바라크, 아라파트와 함께 조용한 숲길을 걸었다. 클린턴은 때로는 두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길을 인도하기도 했다. 이번 회담의 중요성을 고려한 의도적인 ‘긴장풀기’ 연출이었다.

그뒤 잠깐 언론에 사진촬영을 허용한 클린턴 대통령은 “숲속 길을 걸으면서 세사람은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않으며 논평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두 정상도 취재진에 포즈를 취했으나 악수해 달라는 취재진의 요청을 거부했다.

바라크와 아라파트는 회담장에 들어가기에 앞서 서로 상대방에게 “당신 먼저”라며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결국 아라파트가 먼저 들어갔다.

세 정상은 핵심 측근 18명이 참가한 가운데 30분 동안 처음으로 3자간 정상회담을 가졌다.

저녁에 3국의 대표단 40명이 식사를 함께 했고 두 차례 양자간 회담을 다시 가졌다.

조 록하트 백악관 대변인은 “회담의 분위기는 좋았지만 주제는 무거웠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동예루살렘의 지위와 팔레스타인 국가창설, 난민귀환 등 핵심사안에 대해 의견을 나눴고 양쪽은 회담의 어려움을 십분 이해했다”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데도 의견을 같이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백악관측은 합의도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보도를 철저히 통제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또 회담참가자들에게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했고 각국 대표단 출입인사를 각각 20명으로 제한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나갈 수 없다는 엄포이자 다짐인 셈이다.

예상대로 첫날 회담은 탐색전이었으며 앞으로 며칠이 될지 모르는 ‘길고 지루한 여정의 시작’이라고 외신들은 전했다.

첫날 회담을 마친 바라크와 아라파트는 각각 78년 이곳에서 회담을 성사시킨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묵었던 숙소의 침대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22년전 그때 상대방 지도자들을 생각하면서 영감을 얻으라는 주최측의 배려였다.

<윤양섭기자>lailai@donga.com

▼캠프 데이비드 어떤 곳인가?▼

미국 메릴랜드주 캐톡틴 산자락에 있는 캠프 데이비드는 194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전용 휴양지로 만든 곳. 당시 이름은 티베트의 소왕국 이름을 딴 캠프 ‘샹그리라’였다. 11년 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손자 이름을 따 캠프 데이비드로 바꿨다. 주로 대통령 휴양지로 이용됐으며 티토, 대처, 고르바초프, 옐친 등 국빈의 숙소로 이용됐다.

캠프 데이비드가 유명해진 것은 78년 9월. 지미 카터 대통령이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이곳으로 불러 평화협정을 이끌어내면서였다.

당시 카터는 3일 정도면 결론이 날 것으로 생각했으나 13일이 걸렸다. 사다트는 구체적인 조항까지 매듭짓길 바랐고 베긴은 대강의 원칙에만 합의하자고 맞섰다. 두 사람은 10일간 얼굴을 맞대지 않았다. 그러다 11일째. 만나자마자 사다트는 베긴의 태도를 맹비난하면서 워싱턴행 헬기를 요청했다. 협상이 깨지려는 순간이었다. 카터는 “떠난 사람이 실패 책임을 안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카터 대통령은 후일 “일생 중 가장 끔찍한 경험 중의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13일째로 접어들자 양측은 모두 지쳤다. 카터가 중재안을 내놓았고 양측이 받아들였다. 양측은 이듬해 3월 워싱턴에서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이스라엘은 제3차 중동전 때 점령한 시나이 반도를 돌려주는 대신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수교한 것.

이후 캠프 데이비드는 93년 다시 중동평화회담과 인연을 맺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수반이 자치협정을 타결하고 서명한 테이블은 과거 이스라엘―이집트 평화협정 때 썼던 것이다.

“캠프 데이비드의 장점은 외부와 단절돼 만날 사람이 협상 당사자들밖에 없어 결국 친해지고 숲이 협상 당사자들을 이성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최측은 말한다.

<윤양섭기자>laila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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