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턴 프로젝트21] 뉴욕은 지금 '사진 세상'

  • 입력 2000년 7월 4일 18시 58분


<이제 프로젝트는 바뀌었다. 지난 세기 원자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가 미국을 세계대전의 승자로 만들었다면 오늘의 ‘맨해튼’은 ‘문화 패자(패자)’를 꿈꾼다. 문화예술 천재들의 꿈의 도시인 뉴욕.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자금력? 마르지 않는 인재풀? 세계 문화수도 뉴욕의 인프라, 그 역동의 메커니즘을 현지취재로 밝힌다.>

최근 1,2년새 뉴욕 미술계의 중요한 변화라면 사진 작품에 대한 주목이다. 이같은 분위기는 소호(SOHO)나 첼시(Chelsea) 지역에 밀집한 갤러리를 돌아보면 쉽게 체감할 수 있다. ‘다이치 프로젝트’(Deitch Projects) ‘피터 블룸’(Peter Blum) ‘맥스 프로태치’(Max Protetch) ‘메트로 픽처스’(Metro Pictures) ‘소나벤드’(Sonnabend) 등 주요 갤러리의 상당수가 사진 작품을 내걸고 있다. 어림잡아 양 지역에 밀집한 200여 갤러리 중 3분의 1은 족히 넘을 듯하다. 여기에 비디오아트나 설치미술을 전시한 갤러리를 제외하면 조각전을 여는 ‘폴라 쿠퍼’(Paula Cooper)처럼 전통적인 미술작품을 전시한 화랑은 적었다.

‘소나벤드’ 갤러리 관계자는 “요즘들어 많은 갤러리가 신예 작가의 사진이나 프린트 작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면서 “상대적으로 회화나 조각 등 전통적인 미술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 편”이라고 화랑가 분위기를 전했다.

5월 중순 열린 소더비와 크리스티의 경매 결과도 이런 경향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몇년전만하더라도 문전박대 당했을 신예작가의 사진이 고가에 등장했을 뿐 아니라 예상가의 몇 배에 낙찰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뉴욕에서 가장 떠오르는 신예로 꼽히는 매튜 바니(Mattew Barney)의 작품으로, ‘크레마스터 4’(Cremaster 4)의 낙찰가가 18만2000달러(예상가 7만달러)에 달했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바네사 비크로프트(Venessa Beecroft)나 마리코 모리(Mariko Mori)의 퍼포먼스를 촬영한 사진도 예상가의 2∼4배인 5만달러에서 10만달러에 팔렸다.

4∼5년전 1만달러선에서 거래됐던 중견 아티스트의 사진 작품도 몇 배로 올랐다. 신디 셔먼(Cindy Sherman·46)의 ‘언타이틀드 #91’(1981)이 16만달러에, 토머스 스트루스(Thomas Struth·46)의 ‘판테온, 로마’(1992)는 무려 27만달러에 팔렸다.

한편 독특한 금속 조각으로 유명한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64)의 작품 ‘프레지던트 브랜드’의 낙찰가는 6만9750달러에 불과해 대조를 이뤘다. 뉴욕 미술계는 이제 여러장 프린트한 사진 중 한 장 값이 몇 달 걸려 만들어낸 하나뿐인 오리지널보다 비쌀 수 있다는 미증유의 파격을 경험하고 있다.

왜 뉴욕 미술계가 ‘회화의 서자’ 쯤으로 여겨져온 사진을 이처럼 고평가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미국 경기의 호황으로 젊은 백만장자 컬렉터가 대거 등장한 점이 꼽힌다. “월스트리트나 실리콘앨리(Silicon Alley)에서 백만장자가 된 젊은이들은 심각한 그림이나 알쏭달쏭한 조각보다 직접적인 인상을 주는 사진 작품을 선호한다. 화랑이나 경매회사도 이들의 취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13일부터 열리는 바바라 크루거 사진전을 준비 중인 휘트니 박물관 전시 코디네이터 베티 리의 말이다.

한편에서는 사진의 강세를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과 관계 맺는데 익숙한 ‘사이버 세대’의 성향과 연결짓기도 한다. 제프 쿤스, 마리코 모리 등의 신진 아티스트 에이전트인 ‘다이치 프로덕션’ 관계자의 말. “사진 작품을 사는 것은 사진 자체가 아니라 사진으로 표현된 아티스트의 컨셉을 사는 것이다”. 예컨대 사이버 세대에게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명화를 보는 관객을 찍은 스트루스의 작품을 사는 것은 박물관에서 명작을 보면서 느끼는 감동을 자기 소유로 만든다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견작가의 노작들과 비교해볼 때 젊은 아티스트의 사진이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뉴욕타임스는 5월 크리스티와 소더비 경매 결과를 보도하면서 “주식시장의 침체를 가장 먼저 알아차릴 사람은 검증되지 않은 ‘예술 주식’(Art Stock)를 구매한 이들일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뉴욕은 현대미술의 메카다. 세계대전을 피해 모여든 유럽 아티스트들이 개척한 땅에 전후 추상미술, 팝 아트, 멀티미디어 아트가 꽃을 피웠다. 지금도 맨해튼에만 수백개의 갤러리가 저마다 새로운 색깔과 향기를 가진 ‘꽃’들을 전시하고 있고, 소더비나 크리스티 같은 경매회사는 꽃중의 꽃을 골라 봄 가을 시장에 내놓는다.

<뉴욕=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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