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대법원이 통치]낙태-종교-미란다원칙등 초대형 판결

  • 입력 2000년 7월 3일 18시 41분


미국은 지금 연방 대법원이 통치하는 시대다.

임기가 끝나가는 빌 클린턴대통령과 미 상 하원의 대립, 그리고 11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집권 민주당과 의회 다수당인 공화당의 이견이 속출하는 가운데 국가적인 대형 쟁점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미국을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미 대법원은 연중 9개월만 문을 연다. 이에 따라 미 대법원의 1999∼2000년 회기는 지난 해 10월4일에 시작해 지난달 28일 마감됐다. 대법원은 이 기간 중 모두 73건의 소송사건에 대해 사법부의 최종 판단을 내놓았다. 연간 판결 건수로는 1950년대 초반 이후 40여년만에 가장 적다.

그러나 미 언론들은 내용면에선 낙태 동성애 ‘미란다’원칙과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등 미국 사회에서 가장 예민하고 오랜 시간을 끌어온 법률적 현안들에 대해 역사적인 판결이 나왔다고 평가하고 있다.

예컨대 낙태시술을 범죄로 규정한 네브래스카 주의 법률에 대한 지난달 28일의 위헌 판결. 이 판결은 지난 10여년 동안 여성계 의료계 그리고 정치권 등에서 치열하게 진행된 낙태 논쟁에서 마침내 낙태 찬성론자들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꼽힌다.

남성 동성애자(호모)는 보이스카우트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판결, 경찰은 범죄 용의자를 체포할 때 미란다 원칙에 따라 묵비권과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권리 등을 반드시 통보해야 한다는 판결이 있었다. 식품의약국(FDA)은 담배의 니코틴 농도를 규제할 권한이 없다는 판결도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고 공립학교 미식축구 경기장에 모인 관중 앞에서 학생대표가 기도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종교관련 판례도 나왔다. 9명의 대법관들이 이런 일련의 판결에 항상 법률적 견해가 같지는 않았다. 낙태 판결을 비롯한 20건은 다수의견 5 대 소수 의견 4의 팽팽한 논쟁 끝에 판결이 나왔다.

미란다 원칙을 재확인한 판결이 나오기 전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이 다수 의견 쪽에 서자 소수 의견 쪽이었던 앤토닌 스칼리아 대법관은 “대법원장이 말장난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법관들의 견해가 엇갈리는 것은 개인 성향과도 관련이 깊다. 대법관 가운데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75), 샌드라 데이 오코너(70), 앤토닌 스칼리아(64), 앤서니 케네디(63),클라렌스 토머스(52)대법관 등 다섯명은 보수파로 분류된다. 존 폴 스티븐스(80), 데이비스 수터(60),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67), 스티븐 브레이어(61) 대법관 등 네명은 진보파.

고령인 4명 가량은 다음 대통령의 임기 중에 은퇴할 가능성도 있어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 민주 양당 가운데 어느 당이 이기느냐에 따라 미 대법원 색채는 달라질 전망이다. 앨 고어 부통령(민주당후보)측은 “대법원이 보수화되면 여성과 소외계층에 불리한 판결이 잇따라 나올 수도 있다”면서 진보성향의 고어후보가 당선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 대법관들은 법정에서는 근엄하지만 법정 밖에선 자동차 경주(토머스대법관)와 에어로빅(오코너대법관)을 즐기는 등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워싱턴〓한기흥특파원>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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