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종전25주년]2000년의 호치민/외제차 도심질주…

  • 입력 2000년 4월 27일 18시 58분


30일은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통일 베트남이 탄생한지 25주년이 되는 날이다. 한때 남북으로 갈려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른 아픈 기억을 가진 나라, 그리고 한국과도 전쟁의 악연을 맺고 있는 베트남은 우리에겐 결코 먼 이웃이 아니다. 베트남의 통일과정은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우리에게도 교훈이 될 수 있다. 베트남은 86년 개혁개방정책인 ‘도이모이(쇄신)’를 채택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한편 경제개발에 매진, 아시아의 ‘새로운 용’으로 날아오를 꿈에 부풀어 있다. 현지에 파견한 이종훈(국제부) 김동주기자(사진부)의 생생한 현장취재를 통해 베트남의 오늘, 한국과의 관계 등을 시리즈로 조망한다.

27일 오전 베트남 호치민(옛 사이공)시의 최대 번화가인 레로이 대로. 시청앞에서 사이공강까지 3km가량 이어진 아스팔트 길을 수백대의 오토바이들이 굉음을 내뿜으며 쉴새없이 내달린다.

레로이 대로와 윙웨 도로가 만나는 시청부근의 첫번째 교차로에는 월남전 당시 미군장교클럽으로 유명했던 렉스호텔이 있다. 미군에 대한 기억을 말끔히 지워버린 듯 새 페인트로 단장한 이 호텔앞 교차로에는 베트남전 전승 25주년을 기념하는 높이 3m의 아치들이 귀퉁이마다 세워져 있다.

“매년 되풀이되는 기념행사일 뿐이죠.”

렉스호텔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던 시클로 운전사 구엔 티 항(40)은 종전 25주년을 맞는 감회가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전쟁의 상처도 흐르는 세월에 따라 퇴색하고 있다는 느낌을 짙게 풍겼다.

1000년에 걸친 중국의 지배와 프랑스 식민지(1883∼1945)를 거쳐 1946∼75년 프랑스 및 세계 최강국 미국과 오랜 전쟁을 치르고 사회주의인민공화국으로 통일된 베트남. 65년 미국의 하노이 폭격으로 본격화한 베트남전쟁으로 베트남은 300여만명, 참전국인 미국 한국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등 6개국은 7만여명이 희생됐다.

그로부터 25년. 서울 동대문구 크기에 인구 700만명이 거주하는 호치민에서 사회주의의 분위기는 거의 느낄 수 없다. 호치민에는 종전 25주년을 맞아 ‘남쪽 해방 25년, 통일을 축하합니다’ 등의 문구가 씌어진 현수막과 간판들이 시내 곳곳에 설치돼 있다. 그러나 영어와 베트남어로 어지럽게 씌어진 상점간판들과 높은 건물들에 가려 초라하기만 하다.

호치민에서 가장 높은 사이공무역컨벤션센터(33층) 옥상에서 바라본 시 전경은 자본주의의 물결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시외곽에 퍼져 있는 빈민촌과 사이공강 건너편의 강둑에는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반바지만 입은 청년들은 넓은 천과 판자를 보도위에 깔아놓고 뙤약볕 아래 잠을 자기도 한다. 반면 당과 행정부의 간부와 부자들이 모여사는 3구는 고급주택들이 즐비하고 호텔 은행 등 고층건물이 밀집한 1구는 곳곳에서 새건물 골조들이 올라가고 있다. 이 곳 하이바쯩 거리의 ‘하자드’같은 고급 디스코텍에서는 밤마다 부유층 자제들이 대졸 봉급생활자의 평균 월급에 해당하는 150만동(약 12만원)짜리 양주를 즐기며 현란한 조명 속에서 몸을 흔들어댄다. 디스코텍 입구를 지키던 한 청년은 “금요일과 주말에는 밤 10시면 자리가 없다”고 말했다. 3000달러나 하는 일제 오토바이와 2000만원이 넘는 대우 마티즈 자동차는 없어서 못 팔 정도.

86년 시작된 개혁개방정책인 ‘도이모이(쇄신)’가 남긴 빛과 그림자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아직 한국의 20분의 1에 불과한 380달러(99년) 수준이지만 세계 최빈국중 하나였던 베트남은 도이모이에 힘입어 90년대 들어 평균 9%대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과소비와 부정부패의 만연, 빈부격차의 심화, 범죄의 증가 등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도이모이’에 시련을 안겨주고 있다.

‘도이모이’는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베트남은 이를 통해 과거의 적들과 화해했다. 75년 4월 29일 헬기를 이용해 베트남의 미국 시민들을 마지막으로 탈출시켰던 호치민주재 미 대사관은 전후 20년만인 95년 양국이 국교를 수립한 뒤 깔끔한 모습의 총영사관으로 탈바꿈했다. 이 곳은 지난해 5월 무성했던 잡초 대신 아담한 국방색의 2층 건물이 들어섰다. 26일 아침에도 미국행 비자를 받기 위한 베트남인 수십명이 흰색 담장옆에 줄을 서있었다. 미 영사관의 한 관계자는 “미국행 비자는 관광(400건) 사업(850건) 등 한달 평균 1400여건을 발급하고 있다”고 밝혔다.

베트남에는 지금 350개 정도의 미국기업이 진출해 있고 1000명 이상의 미국인이 체류하고 있다. 97년 5월 베트남전 포로 출신의 피트 피터슨 대사가 전후 초대 미국대사로 부임했고 같은해 6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올 3월에는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 등 미국 고위관리들이 잇따라 방문해 관계 강화를 모색하고 있다. 두 나라는 경제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무역협정 체결을 눈앞에 두고 있다. 협정이 체결될 경우 베트남 경제는 도약을 향한 커다란 전환점을 맞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전쟁의 상흔은 희미해지고 있지만 후유증은 남아 있다. 동족상잔의 아픈 기억이 ‘남북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수도 하노이는 물론 호치민시의 경우도 시장 등 주요 간부나 당 고위직에는 모두 하노이 출신들이 포진해 있다. 남부 출신은 철저하게 최고위 공직자리에서 배제된다.

그러나 젊은 세대로 갈수록 전쟁의 아픔보다는 통일 조국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더 강해지고 있다. 호치민 외국어대생 피 티 항가(22)는 “미국과 싸워 이겼다는 것 외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통역관이 되는게 꿈이라는 이 여대생은 “하노이 사람들에게 차별의식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지만 통일로 한 국민이 됐다는 게 더 중요하다”고 힘차게 말했다.

<호치민〓이종훈기자>taylor5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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