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北-美 핵합의 이후 뒷얘기]美헬기 北영공 침범

  • 입력 1999년 11월 23일 19시 57분


“94년 10월 제네바 북―미 핵합의 직후부터 합의가 파기될 위험이 여러차례 있었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당시 북―미합의에 관여했던 미국측 관계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핵합의 이후의 뒷얘기와 위기상황을 23일 특집보도했다. 다음은 요지.

북한과 미국은 94년 12월 워싱턴에서 상호 연락사무소 설치를 위한 4개항의 이면합의를 했다. ①95년 3,4월에 문을 연다 ②직원은 각각 5명으로 한다 ③평양의 미국 연락사무소는 구 동독 대사관을 사용한다 ④미국 사무요원은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들어갈 수 있다 등이었다.

그러나 합의한 지 열흘 정도 지나 주한미군 헬리콥터가 북한영공을 침범하는 예상치 않은 사건이 벌어졌다. 북한의 유엔주재 대표부는 “핵합의가 깨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다급해진 미국은 토머스 허버드 국무부 부차관보를 북한에 급파했다. 그러나 그는 김계관(金桂寬)외교부부부장을 10시간 동안이나 기다렸지만 끝내 바람을 맞았다. 가까스로 송호경(宋浩京)부부장과 만났으나 그는 “사죄문서에 서명하라. 우리는 핵합의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윽박질렀다.

미국의 사과로 이 문제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북한은 이듬해 1월 미국이 발표한 대북제재 해제가 예상보다 훨씬 적은 데 대해 분개했다. 95년 1월 연락사무소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미국대표단이 평양에 들어가자 북한측은 “연락사무소 개설을 연기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북한측은 “미국의 사무실 임대료가 너무 비싸다”며 “미국내 북한인들로부터 모금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거부했다.

비슷한 시기에 북한이 한국형 경수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히자 미 의회 강경파 의원들은 “북한과의 합의를 파기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이 위기는 95년6월 콸라룸푸르의 북―미회담에서 겨우 해결됐다. 북한은 “경수로가 한국형이긴 하지만 거의 미국제이고 한국부품은 5%에 불과하다”는 미국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는 김정일(金正日)총비서의 결단인 것으로 알려졌다.

96년 북한잠수함이 강릉 앞바다에 침투하자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F16전투기를 동원해 북한 잠수함기지를 폭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전면전을 우려하는 미국의 강력한 자제 요구에 따라 계획으로만 그쳤다.

〈도쿄〓심규선특파원〉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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