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 사망/모택동과 등소평]『반항아』와 『모범생』

  • 입력 1997년 2월 21일 19시 56분


[북경〓특별취재반] 중국 근현대사를 이끈 鄧小平(등소평)과 毛澤東(모택동)은 생존시 강한 카리스마를 지녔다는 점과 사후에도 중국인민 대부분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사망 직전 파킨슨씨 병을 앓았다는 점도 같다. 두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928년. 상해로 거점을 옮긴 등이 중국공산당 지하조직에 합류한 이듬해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민당 좌파정권인 무한(武漢)정부의 한 비밀회의장에서 처음 만났을 당시 등보다 열한살 연상의 모택동은 이미 당내에 탄탄한 기반을 구축한 실력가였다. 파리 모스크바 등 풍부한 해외경험과 일처리의 합리성이 돋보인 등은 곧 모의 측근이 됐다. 1931년 강서(江西)혁명근거지에서 홍군(紅軍)1군단이 기세를 떨칠 때 모와 등은 군정치부 일을 나눠 맡았다. 이같은 인연으로 이듬해 공산당 국제파가 모를 제거하려 할 때 등은 「모의 강서소조(小組)수령」으로 지목돼 1차 실각을 맛본다. 등소평은 이후 모가 1935년 준의(遵義)회의를 통해 실권을 장악하자 모의 최측근으로 부상, 팔로군 129사단의 정치위원을 맡아 모의 실권을 위협했던 劉伯承(유백승)사단장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등과 모의 밀월관계는 1966년 문화혁명 전까지 지속됐다. 1956년 당 제7기 7차 중앙위원회전체회의(7중전회)에서 등이 총서기로 선출될 때 모는 그를 『일 잘하고 주도면밀하면서도 공정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이듬해 모가 모스크바에서 흐루시초프를 만날 때는 『등은 원칙과 융통성을 모두 가진, 중국에선 찾아 보기 힘든 지도자』라고까지 극찬했다. 잇따른 실정으로 위기에 빠진 모가 문화혁명을 통해 반전을 시도할 때 등은 공작조를 동원, 모의 「홍위병」(紅衛兵)을 제지함으로써 두사람은 결정적으로 갈라선다. 모는 등을 劉少奇(유소기) 다음의 타도대상으로 지목, 67년 7월 모든 공직을 박탈했다. 문혁(文革)이 끝나갈 무렵인 1976년4월 「1차 천안문사태」가 발생했을 때 등은 모에 의해 두번째로 축출됐다. 등이 문혁을 계기로 모와 갈라선 데는 그들이 주창했던 사회주의론의 차이가 흔히 거론된다. 그러나 튼튼한 중국 사회주의 상부구조를 위태롭게 받치고 있는 하부구조의 허약함을 지켜봤던 두사람의 이론과 진단 처방의 차이점은 각자의 성장배경 및 시대환경과 무관할 수 없다. 등의 소년기는 반청(反淸)무장봉기 신해(辛亥)혁명 5.4운동 등 중국근대사의 격변기였다. 지주집안의 장남이었던 등은 집에서는 부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고 학교에서도 소문난 모범생이었다. 등의 부친 鄧文明(등문명)은 아들이 16세가 되자 흔치 않은 프랑스유학을 보냈고 그곳 생활비를 대기 위해 전답까지 팔았다. 프랑스 유학생활은 등이 자본주의 사회와 그 모순을 직접 체험한 소중한 시기로 이후 등의 개혁개방노선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반면 모는 「맨발에 쇠똥을 묻히고 다니며」 험하게 자랐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권위의 상징인 부친과 선생님에게도 곧잘 반항하곤 했다. 모의 부친 毛順生(모순생)은 퇴역군인 출신으로 가산을 늘리기 위해 모가 소학교만 졸업하기를 바랐다. 모는 후에 가까스로 호남성 장사(長沙)의 제1사범학교를 졸업했지만 1949년 모스크바 방문이 첫 해외경험일 정도로 중국 안에서만 맴돌았다. 등과 모의 해외경험 차이는 등시대에 중국이 대대적인 개방에 나선 반면 모는 대약진운동 등 자급자족체제 건설에 중점을 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권력 유지방법에도 두사람은 큰 격차를 보였다. 모택동은 자신의 노선에 반기를 들었던 彭德懷(팽덕회) 林彪(임표) 유소기 등을 차례로 처단한 반면 등은 다양한 견해를 용인하고 반대파들과 협력, 자신의 노선을 강화하는 절묘함을 보였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