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가 망가지고 있다” 터키유생 에네스 탄식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5일 17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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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너무 개방적… 다 받아들이면 미래 흔들려"

누구보다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였다. 그를 만나기 위해 연락한 건 추석 연휴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이 사람 만큼 올 추석이 바빴던 외국인도 많지 않을 것 같다. 이날도 TV 추석 특집 방송에 영화 홍보, 광고 촬영, 언론사 인터뷰 등으로 빗발치는 전화 때문에 인터뷰 진행이 쉽지 않았다.

한국 거주 12년 차. 영화배우, 무역인, 방송인, 박근혜 대통령 통역 등 다양한 이력으로 최근 가장 높은 관심을 받고 있는 외국인 에네스 카야(터키·30)를 만났다.

그가 이토록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이어서가 아니다.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 절대 안 돼","어린 나이 독립 절대 반대""혼전 동거 절대 안 돼"라고 외치는 그의 보수적 가치관 때문이다. 오죽하면 '터키유생''조상님''꽉네스'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게다가 흠잡을 데 없는 한국어 실력과 논리 정연한 설명은 이방인과 대화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본인이 인기를 얻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한국이 많이 개방되긴 했으나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많다. 그런데 개방적 사회 흐름에 따라 티를 내지 않고 살뿐이다. 한국인도 생각은 갖고 있으나 표출하지 않는 말을 외국인이 방송에서 거침없이 말해버리니까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방송 후 '속이 후련하다'고 말하는 댓글들을 많이 접한다."

- 터키유생, 조상님, 꽉네스 등 보수적 의미가 강한 별명이 마음에 드나?

"터키유생이 제일 맘에 든다. 요즘 말로 따지면 지식인, 공부 많이 하고 아는 것도 많은 사람 아닌가! 참 감사한 별명이다. 그런데 꽉네스는 좀 그렇다. 보수적인 것과 꽉 막힌 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이런 별명들이 부담을 줄 때도 있다. 어디 놀러 가서 친구들과 까불고 놀다 보면, 지나는 사람들이 '유생인데 그러면 안 되지'라고 말한다. 나도 사람인데 스트레스도 풀고 그래야 하는데 별명 때문에 신경 쓰일 때가 있다."

- 본인의 생각은 보수적일지라도 흐름에 맞춰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안 드나?

"최근에 그런 생각을 해봤다. '내가 너무 보수적인 건가? 나만 너무 고집스러운 건가?' 하지만 내가 너무 보수적이라기보다는 요즘 사회가 너무 개방적으로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가 너무 풀어졌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그런 것들을 누구나 다 받아들이면 미래가 흔들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선조들이 지킬 것은 지키며 살아 왔기에 오늘의 한국이 있다고 생각한다."

- 어쩌다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됐나?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는?

"2002년 9월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당시 아버지 친구 분이 한국에 계셨는데 한국에 대해 자랑을 많이 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아버지가 한국으로 유학 가지 않겠냐고 권유하셨고, 갑작스럽게 짐을 싸서 오게 됐다. 돌아갔을 때 유용한 것을 배워야겠단 생각에 한국이 제일 뛰어난 분야인 IT를 선택, 한양대 정보기술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처음엔 대학만 졸업하고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살다 보니 뜻하지 않은 기회가 생겼다."

"대학생 때 길거리 캐스팅으로 아르바이트 삼아 모델 활동을 조금씩 했었는데, 거기서 알게 된 모델 친구가 MBC 느낌표라는 프로그램에서 한국말 잘하는 사람을 찾고 있으니 한번 만나보라고 소개해줬다. 그걸 계기로 2010년에는 초능력자라는 영화를 찍게 됐고 사람들에게 얼굴을 알리게 됐다."

- 연예인이 직업인가? 아니라면 본업은 무엇인가?

"터키의 과일 음료 등을 수입하는 무역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2008년 졸업 후 한국 터키 간의 무역 컨설팅 일을 해오다가 2009년도에 귀네슈 당시 FC 서울 감독 전담 통역사를 맡게 됐다. 또 터키 대사관의 요청으로 터키 국빈과 박근혜 대통령 통역을 도왔다. 지금은 한국-터키 간 무역 회사를 설립해 직접 운영하고 있다. 방송은 꾸준히 재미로 하고 있다. 계약하자는 에이전시들은 많은데 아직은 개인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 유명인으로 살다 보면 댓글로 상처를 많이 받게 된다. 특히 '보수적'이라는 이미지가 한몫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요즘에는 무슨 말만 하면 다음 날 기사가 쏟아지기 때문에, 댓글을 보게 된다. 그런데, '과일 많은 나무가 돌멩이를 많이 맞는다'는 터키 속담이 있다. 대중의 눈에 많이 띄고 가진 게 많기에 사람들이 돌을 많이 던지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그냥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다만 가족이 언급되면 힘들긴 하다. 개인에 대한 악플은 문제 되지 않는데, 가족, 종교, 나라, 문화를 가지고 욕하면 내가 아닌 다른 여러 사람까지 힘들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슬프다."

- 방송활동을 하는 외국인을 통틀어 한국말을 가장 잘하는 것 같다. 언어를 습득하는 자신만의 특별한 노하우가 있나?


"한국에서 5년, 10년 살면서 한국말 못하고 영어만 쓰는 외국인 보면 답답하다. 문제가 있다.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한국 사람과 어울리고 한국에 단 몇 년이라도 살려고 왔으면 배워야 한다. 나는 한국에 눌러 앉을 생각은 없었지만, 처음부터 언어는 제대로 배우자 생각했다. 사실 어학당을 1년 다니는 동안 불량학생이었다. 숙제를 제대로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하지만 말은 정말 많이 했다. 보는 사람마다 아무 말이나 걸었다. 학교 안에서 소문이 쫙 나 있었다. 나중엔 교내에서 나를 몰라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연예활동 관련해 꿈은 없나?

"연예인이 돼야겠다는 목표는 없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때다 싶어 이것저것 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잘못하면 터키와 가족에 누가 될까 조심스럽다.

나의 목적은 지금 하는 사업을 좀 더 확장해서 터키와 한국 간의 교류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다. 한국-터키 간 무역의 90%가 한국 물건이 터키로 가는 것이고, 터키 물건이 한국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러한 차이를 줄이고 싶다. 사업도 키워서 부자 되고 싶은 생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았어도 지금까지 충분히 잘 먹고 잘살았다."

2시간 남짓 인터뷰를 하며 에네스는 은어나 줄임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인터뷰여서 라기보다는 몸에 밴 언어 습관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어가 망가지고 있다. 이러다가 나중에 후손들에게 제대로 된 문화와 언어를 물려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외국인의 탄식이 한국인인 나를 잠시 돌아보게 했다.

박태근 동아닷컴 기자 pt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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