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쓰면 싼티 날까봐? 패션업계 한글파괴 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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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5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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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띄르적 디테일로 페미닌하게… 내츄럴한 탄 컬러로 콤비한…

최근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백화점 매장의 브랜드 소개 문구. 이 글에 대해 “아무리 읽어봐도 이 브랜드가 여성복인지 남성복인지조차 모르겠다”는 등 수많은 비판 댓글이 달렸다. 사진 출처 인터넷 화면 캡처
최근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백화점 매장의 브랜드 소개 문구. 이 글에 대해 “아무리 읽어봐도 이 브랜드가 여성복인지 남성복인지조차 모르겠다”는 등 수많은 비판 댓글이 달렸다. 사진 출처 인터넷 화면 캡처
‘아티스틱한 감성을 바탕으로 꾸띄르적인 디테일을 넣어 페미닌함을 세련되고 아트적인 느낌으로 표현합니다.’

최근 한 인터넷 사이트에 백화점의 여성복 브랜드 소개 문구를 찍은 사진이 올라왔다. 영어와 우리말, 프랑스어가 어지럽게 섞여 있는 이 문장은 ‘예술적인 감성을 바탕으로 맞춤복의 세밀함을 더해 여성스러움을 세련되고 예술적인 느낌으로 표현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사진은 ‘한글 파괴의 신(神)’이라는 제목을 달고 포털사이트와 블로그에 퍼져나갔다. “차라리 영어로 써라” “의류 브랜드 소개인지조차 몰랐다” 같은 조롱 섞인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고급 패션 브랜드와 커피, 와인, 아웃도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업들이 제품을 설명하거나 광고를 할 때 외국어를 과도하게 사용해 소비자의 혼란을 더하고 있다.

우리말 파괴 현상이 극심한 곳은 고급 패션 브랜드들이다. ‘목걸이’ 대신 ‘네크리스(necklace)’, ‘말굽 모양’ 대신 ‘호스슈(horse shoe) 디자인’이라고 쓰는 것은 이미 너무나 흔한 일이다. 한 백화점은 여성용 가방을 소개하며 ‘내츄럴한 터치의 탄 컬러 가죽을 콤비한 유러피안 스타일의 숄더백(자연스럽게 손질한 황갈색 가죽을 덧붙인 유럽풍 가방)’이라고 썼다. 여기에서 순우리말 표현은 조사를 제외하면 ‘가죽’이란 두 글자뿐이다.

와인과 커피의 맛을 표현할 때 쓰이는 ‘보디감’은 ‘음료를 마셨을 때 입 안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을 뜻하는 보디(body)와 한자 ‘감(感)’이 합쳐져 생긴 기형적인 합성어다.

아웃도어 업계에서는 신발의 밑바닥 부분을 이르는 밑창과 안창 대신 ‘아웃솔(outsole)’ ‘인솔(insole)’이란 영어 표현을 쓰는 것이 일반화됐다. ‘통풍이 잘되는 벤틸레이션(ventilation·통풍) 시스템’ 같은 이중 표현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소비자들이 제품 설명을 보고도 그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달 말 서울의 한 백화점 와인 코너를 찾은 최모 씨(46·여)는 “와인 이름이 어려워 설명을 보고 사려고 했는데 그 내용이 너무 어려웠다”며 “‘크리미한 피니시’나 ‘토스티한 맛’이 뭔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전우영 충남대 교수(심리학)는 “광고에서 이해할 수 없는 단어가 나오면 소비자들은 알 수 없는 뭔가가 있다고 판단해 해당 제품에 대해 근거 없는 환상을 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것이 바로 기업들이 노리는 ‘포인트’다. 실제로 기업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을 고집하는 이유에 대해 ‘고급화 전략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한 대형마트 주류 담당 바이어는 “제품을 소개할 때 영어 표현인 ‘라이트 보디(Light body)’ 대신 ‘가볍다’라고 하면 고객들이 ‘싼 티가 난다’며 구매를 꺼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어를 쓴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우리말의 아름답고 다양한 표현이 점차 자취를 감출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김선철 국립국어원 연구원은 “외국어를 우리말로 순화해 표현하려는 의지 자체가 부족한 곳이 많다”며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우리말은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없는, 제한적인 언어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다행히 업계 일부에서 자정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한 홈쇼핑업체 관계자는 “국적 불명의 말을 최대한 줄이려 쇼핑호스트들에게 한국어능력시험을 볼 것을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우리말#한글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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