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화 감독 “끼던 금반지 리분희에게 선물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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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4일 07시 00분


현정화 감독이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당시 찍은 미공개 사진을 스포츠동아를 통해 처음으로 꺼내놓았다. 사진 속에서 맑은 피부를 드러내고 해맑게 웃는 리분희를 가리키며 현정화 감독은 “착하고 순하게 잘 나왔다”며 웃었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bluemarine007
현정화 감독이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당시 찍은 미공개 사진을 스포츠동아를 통해 처음으로 꺼내놓았다. 사진 속에서 맑은 피부를 드러내고 해맑게 웃는 리분희를 가리키며 현정화 감독은 “착하고 순하게 잘 나왔다”며 웃었다. 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bluemarine007
■ 영화 ‘코리아’로 재조명 남북단일팀 신화의 주역 현정화 감독

화장품·속옷·노래테이프 등 준비
농담과 선물로 마음의 벽 허물어
“진작 영화로 나왔어야 할 이야기”
뒤늦게 영화화 나선 감독 타박도


“누구 아들이냐고 물으면 늘 ‘엄마 아들’이라던 아이가 어제는 ‘현정화 아들’이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이죠.”

한국 탁구의 고유명사로 통하는 현정화 감독(43·한국마사회)은 21년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잊지 않고 남겨둔 기억을 모조리 꺼내 영화 ‘코리아’(감독 문현성)에 쏟아부었다. 엄마의 이야기를 영화로 본 열 살난 아들은 이제 “현정화의 아들”이라고 말하게 됐다.

19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 남북 단일팀 우승 실화를 스크린으로 옮긴 ‘코리아’가 개봉한 3일, 서울 압구정동의 한 극장 앞 카페에서 현 감독을 만났다.

‘코리아’는 어쩌면 현정화로부터 시작한 영화다. 배경인 세계탁구선수권에서 감동 스토리를 일군 실존인물이자 영화에는 기획부터 참여해 하지원·배두나 등 배우들에게 탁구를 가르쳤다.

“21년 전 극적인 일을 많이 겪어 영화에선 그걸 덜어내느라 오히려 어려웠다”는 현정화 감독이 ‘그 때 그 일’을 털어놓았다.

● “우린 에이스인데 남의 방에 왜 놀러 가요”

영화 보는 내내 울었다는 현정화 감독은 “그땐 말 못하고 마음 속에만 간직했던 얘기를 영화 속 하지원의 대사를 통해 다 쏟아냈다”며 후련해 했다. “관객이 허구와 진실을 구분하는데 ‘코리아’에 나오는 상황은 거의 사실”이라며 “실화는 영화보다 극적이다”고도 했다.

현정화와 리분희는 당시 남북 탁구를 대표하던 스타. 단일팀 결성 뒤 차츰 친해지며 코치진의 눈을 피해 서로의 방까지 찾아다니던 다른 선수들과 달리 현정화와 리분희는 서로의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에이스’들만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리분희가 언니였지만 솔직히 내가 더 주목받고 싶었어요. 하하! 기자들도 많았는데 더 튀고 싶었고. 그러다가 친해졌어요. 시간의 힘이고, 어떻게든 중국을 이겨야 했으니까. 어느 날 밤 리분희가 자기 남자친구가 누군지 저한테만 알려줬죠.(웃음) 함께 온 북한팀 김성희 이었는데 그러고보니 늘 둘이 붙어서 식사를 하더라고.”

현정화는 남북한 선수들이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 건 ‘농담’과 ‘선물’의 힘이었다고 돌이켰다. “한국 유행어를 북한 선수들에게 알려주면서 서로 웃기 시작했고 미리 준비한 선물을 나누며 더 친해졌다”고 했다.

당시 화장품 회사 소속이던 현 감독은 화장품과 속옷, 스타킹을 챙겼다. 여기까진 ‘대외적’ 선물. 따로 준비한 건 당시 인기가수이던 김범룡의 노래 ‘바람 바람 바람’이 담긴 카세트 테이프와 성경책. 남자선수들은 주로 술을 나눠마셨고 그 중엔 뱀술까지 있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헤어지기 전날 밤 제가 끼고 있던 금반지를 빼서 ‘언니, 이거 갖고 가’ 하며 리분희한테 줬어요. 그땐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조용하게 참을 수밖에 없었죠. 하지원처럼 하고 싶은 말 다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니까요.”

리분희는 현재 북한 장애인선수협회에서 일하고 있다. 얼마 전 통일부 장관을 만난 현 감독은 리분희와의 재회와 남북 탁구 교류를 제안했다. “영화를 준비하다보니 리분희가 더 보고 싶고 더 생각났다”며 “바람이 크면 언젠가 만날 것 같지만 현실의 장벽은 여전히 높은 것 같다”고도 했다.

경기를 마친 현정화(오른쪽)와 북측 리분희가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손으로 ‘브이’를 그려보이는 모습.사진제공|현정화
경기를 마친 현정화(오른쪽)와 북측 리분희가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손으로 ‘브이’를 그려보이는 모습.사진제공|현정화

● “왜 이제야 온 거죠?”

‘코리아’ 제작진은 영화를 기획하며 현정화 감독을 가장 먼저 찾았다. 태릉선수촌에서 제작진을 만난 현 감독의 첫 마디는 “왜 지금 찾아왔느냐”는 타박. “진작 영화로 나왔어야 하는 이야기”라는 이유에서다.

‘코리아’ 제작자와 연출자 문현성 감독은 현 감독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돌이켰다. “계속 혼나면서 술을 마셨고 결국 거의 기어나오다시피 태릉을 빠져나왔다.”

“무조건 돕겠다”고 약속한 현 감독은 자신을 연기할 배우로 하지원을 추천했다. 현 감독은 “(하지원을)찍었다”고 표현했다.

“카리스마가 있는 여배우가 필요했고 강한 이미지가 좋았어요. 연습하는 걸 보고 ‘내 눈이 틀리지 않았구나’ 싶었죠. 선수의 눈으로 보니 지원이는 캐치하는 능력이 탁월해요. 마인드도 좋고. 우린 ‘절친’이 됐어요.”

‘코리아’ 배우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킨 현 감독은 특히 하지원과는 “위기 속에 다진 우정”이라며 일화를 소개했다. 연습이 한창이던 때 훈련장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훈련이 중단되고 한쪽에서 대책회의가 열렸다. 힘겨운 훈련에 지친 하지원이 ‘출연 포기’를 선언한 탓이다.

“닭발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뭐가 문제냐 물으니 지원이가 ‘너무 힘들고 패닉 상태’라고 하더군요. 패닉은 열정이 없는 사람에게 오는 거라고, 너무 완벽하려고 하지 말아라, 이미 잘하고 있다고 용기를 줬어요.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도 했죠. 그 일을 겪고 서로에게 확 다가갔죠.”

영화가 공개된 지금, 현정화 감독의 바람이 있다.

“21년 전 젊은이들에겐 통일에 대한 희망의 진정성이 지금보다 더 컸어요. 요즘은 무뎌지고 무감각해진 것 같아요. 물론 저도. 우리 앞에 있는 북한 그리고 리분희를 한 번쯤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이에요.”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트위터@madeinha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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