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눈 멀자, 잔혹한 진실이 보였다

  • 입력 2008년 11월 11일 02시 58분


■ 20일 개봉 ‘눈먼 자들의 도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눈이 머는 전염병에 걸렸다. 용케 병에 걸리지 않은 당신은 이제 앞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지구인이다. 무엇을 하겠는가.

20일 개봉하는 ‘눈먼 자들의 도시’(18세 이상 관람가)는 이런 가상 상황을 설정해놓고 관객을 집요하게 몰아세우는 영화다. 객석은 앞 못 보는 사람들을 몰래 지켜보는 자리가 된다. 그 경험은 가시방석처럼 불편하고 찜찜하다.

채근담(菜根譚)에는 “사람들이 훤히 보는 데서 죄를 짓지 않으려거든, 먼저 남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남이 보는 데서 좋은 사람이기는 쉽다. 하지만 아무도 서로를 볼 수 없다면? 영화 속에서 상냥했던 바텐더는 권총 한 자루에 기대어 잔혹한 악한으로 돌변한다. 성실한 남편이었을 사내들은 식량을 미끼로 삼아 힘없는 여자들을 무리지어 강간한다. 절망에 빠진 남녀는 똥 덩어리가 굴러다니는 복도에서 육체적 쾌락에 탐닉한다. 잔혹한 영상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명쾌하다. 당신의 인격은 저렇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영화의 동명 원작소설을 쓴 포르투갈 출신의 노벨상 수상 작가 조제 사라마구(86) 씨는 이런 상황에서 마음수양을 권하지는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극단적 상황에서 쉽게 내팽개쳐지는 이성의 나약함이다. 1995년 발표된 이 소설은 전 세계 130여 개 나라에 번역됐다.

인기 높은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작업은 작가와 영화감독 모두에게 큰 부담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베스트셀러 ‘향수’를 원작으로 2006년 나온 영화는 ‘주역 배우가 캐릭터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등 원작 팬의 비난을 받았다.

브라질의 페르난두 메이렐레스 감독은 밀실에 몇 시간 동안 스스로를 가둬놓는 등 각 장면을 이해하고 촬영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노력의 흔적이 엿보이는 몇몇 장면 디테일은 사라마구 씨의 문장을 스크린에 그대로 끌어온 듯 보인다.

【1】“우유의 바다에 빠진 것처럼 진하고 균일한 백색 어둠.”

이 영화에서 전염병에 걸려 장님이 된 사람들은 실명(失明)이 아닌 실암(失暗)을 경험한다. 눈을 감은 상태처럼 빛이 들어오지 않아서 깜깜한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빛이 눈동자로 들어와서 사물의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것이다.

감독은 카메라 노출을 극단적으로 높여 설원(雪原)에서의 ‘화이트 아웃’처럼 사물 경계가 흐릿해지게 했다. 의상과 배경에 흰색을 많이 쓴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2】“모두 눈이 멀었소. 도시 전체, 나라 전체가.”

격리 수용됐던 정신병원을 탈출한 주인공 일행 앞에 눈먼 사람들로 가득해진 거리의 절망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좀비처럼 떠돌고, 대열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굶주린 개들이 잡아먹는 아비규환.

이 장면은 캐나다 온타리오와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차량을 통제하고 촬영했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이 ‘오픈 유어 아이즈’(1997년)에서 보여줬던 ‘사람들이 사라진 텅 빈 도시’의 풍경만큼 충격적이다.

【3】“크게 뜬 눈은 눈물을 쏟으며 노래가 들리는 방향으로 멈춰 있었다.”

노인의 손에 들린 작은 라디오. 죽음보다 못한 삶을 이어가던 사람들은 희미한 노래에 젖어들며 평화를 찾는다. 세상과 차단된 수용소에 잠시 열린 작은 창.

‘쇼생크 탈출’(1994년)에서 느닷없이 퍼져 나온 아리아에 취해 하늘을 바라보던 죄수들을 연상시킨다.

위로처럼 삽입된 감미로운 노래는 루이스 본파의 ‘삼볼레로’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자료제공: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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