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임채청 칼럼]‘바뀐 세상’의 뒤틀린 풍경

  • 입력 2004년 6월 15일 18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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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보고 “여!” 하고 소리치는 게 여당이라는 오래된 우스개가 있다. “여!” 소리에 묻어 있는 은근함을 음미해 보면 이는 야유처럼 들리기도 한다. 더 우습고 거슬리는 것은 현 집권세력의 표현대로 ‘바뀐 세상’의 뒤틀린 풍경이다. 세상보다도 빨리 얼굴빛을 고친 사람들이 다시 새로운 권력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은 모습이 꼭 그렇다.

으레 그러려니 하고 지나칠 수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삭이기 어려운 게 하나 있다. 어떤 권력이 들어서도 버릇처럼 “여!”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도 모자라 권력의 눈 밖에 난 사람들을 마구 몰아붙이는 것이다. 무슨 고매한 가치나 원칙, 이념이나 주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우선 소박한 인정과 기본적인 도리에 어긋난다.

▼칭찬을 해도 비난받는 세상▼

부박한 정치만 탓하려는 게 아니다. 언론 현실도 따져볼 대목이 많기에 하는 말이다. 언론기관간의 건강한 상호 감시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특정 신문의 권력 비판에 특정 방송이 앞장서서 낯을 붉힐 입장은 아닌 듯해서다. 특정 방송도 스스로 살아 있는 권력과 거리를 둔 적이 있었는지 헤아려 본다면 그 정도 불만은 수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정치적 사고의 출발점을 1980년대에 두고 있는 현 집권세력은 그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 시절 집권세력과 맞섰던 그들에게 그나마 힘이 된 것은 권력에 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던 특정 신문이었지 권력의 품 안에 있던 특정 방송이 아니었다. 1998년의 정권교체 전과 후를 대비해 봐도 전도된 언론 상황에 쓴웃음이 절로 나올 것이다.

이쯤에서 한번 점검해 보자. 만약 몇 년 뒤 또 세상이 바뀐다면 어찌 될까. 그때는 방송이 권력 비판에 나설까. 정권을 내놓은 현 집권세력과 방송의 우호관계는 유지될까. 불행히도 답변이 쉽지 않다. 지나온 과정을 살펴보면 그때도 특정 신문은 권력과 비켜서려 하겠지만 특정 방송은 어디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인 까닭이다.

사실 방송의 대통령 탄핵보도를 둘러싼 편파성 논란과 관련해서도 구구한 논리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이 같은 논란 자체가 권력의 양지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방송의 업보일 수 있다는 뜻에서다. 따라서 방송도 펄쩍 뛸 일만은 아니다. 경위야 어쨌든 방송의 대통령 탄핵보도가 살아 있는 권력에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도가 균형을 잃었다는 지적에 대한 특정 방송의 반론 중 지금 돌아봐도 숨이 막히는 게 있다. 찬반 여론을 근거로 든 것이다. 가변적인 여론에 따라 보도의 양과 질이 정해질 수 있다는 발상이 엉뚱하다. 그런 식이라면 대통령 기사도 지지율에 따라 그날그날 춤을 춰야 할 것이다. 지지율이 높으면 실책을 줄이고 반대의 경우엔 실적을 줄이는 식으로.

최근엔 이런 일도 있다. 특정 신문들의 권력 비판을 줄기차게 비난해 온 친여 인터넷 매체가 이들 신문의 대통령 칭찬까지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즉,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다며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반대한 대통령의 판단이 옳다는 이들 신문의 평가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이견 표명은 자유지만 그 방식은 틀렸다. 정히 문제를 삼고자 했으면 발언의 당사자인 대통령을 직접 비난하는 게 정도였다.

▼單色의 언론을 원하는 건가▼

이처럼 비판도 못마땅하고 칭찬도 못마땅하다면 대체 뭘까. 특정 신문들은 우리와는 사상이 다르니 그냥 싫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나아가 이들 신문을 겨냥한 범여권의 언론개혁 움직임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해야 할까.

그러기에는 너무 무섭다. 그렇다면 그들 자신조차 원하지 않았던 두려운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다. 모든 사안에 대해 모두가 같은 말을 하는 단색의 언론만이 존재하게 된다면 그것은 국가적 재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절대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임채청 부국장 cc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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