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KBS, 한국방송 맞아?”

  • 입력 2003년 10월 5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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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방송 맞아?”

한국방송이란 공식 명칭을 가진 KBS 내부의 목소리다. 재독 학자 송두율(宋斗律)씨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혐의가 불거지면서 그를 해외 민주화 투사로 묘사한 KBS의 정체성을 스스로 묻고 있는 것이다.

KBS는 최근 ‘일요스페셜-송두율의 경계도시’ ‘한국사회를 말한다-귀향, 돌아온 망명객들’을 방영한 뒤 ‘KBS가 정말 송씨의 실체를 몰랐을까’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종수(李鍾秀) KBS 이사장도 송씨의 귀국에 일정 역할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급기야 2일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정연주(鄭淵珠) KBS 사장이 90년대 초 간첩사건에 연루됐다는 주장이 나왔고, 정 사장은 “그러면 왜 나를 조사하지 않았겠느냐”고 맞서는 일도 벌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KBS의 한 고위 간부는 “정 사장 취임 이후 프로그램 제작진이 최면에 걸려 사실과 주장을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며 “‘한국사회를 말한다’를 본 일부 직원들이 ‘별 것 아닌데 보수 언론이 문제 삼는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물론 정 사장은 2일 국정감사장에서 두 프로그램에 대해 “시청자들에게 혼란과 오해를 불러일으킨 점을 깊이 사과한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도 4일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사실을 알았더라면 (송씨에게) 미리 털고 들어오라고 했거나 아예 오지 말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왜 송씨의 실체를 말해 주는 팩트(사실)가 무시됐느냐는 점이다. 송씨는 1994년 7월 장례식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면서 울었다. 이 장면은 당시 KBS가 보도했으며 자료도 보관돼 있다. 또 송씨가 김 주석과 식사하는 사진이 91년 한겨레신문에 게재된 바 있다. 당시 정 사장은 한겨레신문의 워싱턴 특파원이었다. 문제의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이런 사실을 외면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 결과 KBS가 주관적인 입장에서 주요 사실을 걸러내고 방영한 ‘텔레바이즈드 리얼리티(Televised Reality)’와 실제 현실인 ‘리얼(Real) 리얼리티’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괴리가 생겼다. 지명관(池明觀) 전 KBS 이사장도 “송씨의 독일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데 KBS가 한 방향으로 몰아갔다”고 지적했다.

KBS의 편향성은 그동안 주류 언론을 겨냥해 온 ‘미디어 포커스’ 등 여러 프로그램의 문제점으로 제기돼 왔다. 제작진의 자율을 강조한다는 정 사장은 최근 간부회의에서 일제강점기 동아, 조선일보를 친일지로 몰아붙인 ‘한국사회를 말한다-일제하 민족언론을 해부한다’를 칭찬하면서 “신문과 방송이 싸우면 방송이 이긴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장의 이런 발언이야말로 프로그램의 편향을 부채질하는 박수가 아닌가.

최근 KBS는 ‘송두율 파문’과 관련해 진땀을 흘리고 있는 듯하다. KBS 보도국은 2일 송씨의 기자회견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그의 주장이 여과 없이 나갈 우려가 있다”며 생중계하지 않았다. MBC, SBS가 생중계한 데 비해 이례적이다. ‘미디어 포커스’도 언론들이 ‘송두율 파문’을 크게 다루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4일 이를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고 진행자 멘트로 ‘사상 공방’을 우려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사실을 외면해 온 KBS는 사상 공방의 뒤에 숨을 게 아니라 송씨와 KBS의 관계에 대한 의혹, 북한 노동당원과 민주화 투사를 분간하지 못한 원인을 속 시원히 밝혀야 한다. 그래야 제2, 제3의 ‘송두율 프로그램’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연 4800억원의 시청료가 아깝다는 시청자들의 불만이 예사롭지 않다.

허엽 문화부 차장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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