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5년 록 허드슨 에이즈 사망

  • 입력 2003년 10월 1일 18시 55분


1985년 10월 2일.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섹스어필한 용모로 뭇 여성을 사로잡았던 할리우드의 스타 록 허드슨이 에이즈로 숨졌다. 그가 믿기지 않을 만큼 초췌한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나 에이즈 감염사실과 동성애자임을 고백한 지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1948년 스크린에 데뷔한 뒤 40년 가까이 자신의 성(性) 정체성을 숨기고 ‘마초의 대명사’로 살아야 했던 비운의 삶이 마침내 막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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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에이즈 감염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미국 사회는 경악했다. 그는 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이 같은 고백을 했을까.

에이즈가 알려지기 시작한 80년대 초반 미국에서 에이즈는 저주받은 천형(天刑)이었고, 의학적 사형선고에 앞서 사회적인 격리와 매장의 대상이었다.

21세기 흑사병, 동성애, 혼외정사…. 에이즈를 둘러싼 숱한 오명(汚名)은 질병이 타락한 공동체를 심판한다는 중세 기독교의 낡아빠진 도그마를 부활시키고 있었다. 에이즈 환자는 마땅히 방종과 범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완고한 성 관념은 바로 에이즈의 시대, 80년대와 맞물린다.

특히 에이즈가 외부에서 유입됐다는 역병(疫病)의 이미지는 에이즈 담론의 보수성을 강화시켰다. 에이즈는 미국에서는 아프리카의 질병이었고 유럽에서는 미국의 질병이었다. 그래서 환자는 치료받기보다는 격리됐다.

“에이즈는 용서할 수 있어도 동성애는 용서할 수 없다”는 영화 ‘필라델피아’의 반어적 메시지는 여전히 에이즈가 동성애의 올가미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준다.

미국의 저명한 에세이스트이자 소설가인 수전 손택은 역저 ‘은유(隱喩)로서의 질병’에서 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마음속 깊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하하는 데서 오는 고통이라고 지적했다.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질병이 아니다. 질병이 가진 낙인, 질병이 가진 이미지, 질병에 선험적으로 주입된 공포다. 한마디로 질병의 은유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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