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영화 섹스 마지막 비상구

  • 입력 1999년 8월 26일 19시 55분


20세기의 마지막 해이자 1000년의 대미를 장식하는 올해, 세계의 스크린을 사로잡는 화두는 단연 ‘성(性)’이다. 기대와 공포,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세기말에 왜 ‘시네마 천국’은 ‘관능의 제국’으로 탈바꿈하려 드는 것일까?

◆넘실대는 성

9월1일 개막될 베니스국제영화제. 알베르토 바르베라 집행위원장은 이달초 기자회견에서 “이번 베니스영화제에서 지속적으로 화제가 될 주제는 이 시대의 성”이라고 밝혔다.

그 취지에 들어맞는 출품작들은 개막작인 미국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을 비롯해 경쟁부문에 오른 한국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 벨기에 프레데릭 폰테인 감독의 ‘포르노그라피 정사’ 등 3편.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만 부부가 주연한 ‘아이즈 와이드 셧’은 미국 상류층의 성에 대한 비정상적 집착을 담은 작품. 또 ‘포르노그라프 정사’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고 오직 섹스에만 탐닉하는 두 남녀를 그렸다.

국내 극장가도 다를 게 없다. 한국영화 ‘노랑머리’가 올 초여름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거짓말’에 대한 등급보류판정이 논란이 되고 있는 동안 이복남매의 근친상간을 소재로 한 프랑스 영화 ‘폴라X’가 21일 개봉됐다. 9월4일에는 폴란드 안드레이 줄랍스키 감독의 ‘샤만카’가 선보인다. ‘샤만카’는 자기 파괴적일 정도로 섹스에만 몰두하는 남녀의 모습을 엽기적으로 그린 영화다.

◆시대와 성

지금까지 영화 속의 성은 시대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은 “세계영화사에서 성적 표현이 가장 만개한 때는 70년대”라고 설명한다. 성을 소재로 삼았고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살로 소돔의 120일’ ‘감각의 제국’ ‘클락웍 오렌지’ ‘엠마뉴엘’ 등이 모두 70년대에 제작됐다.이 때는 60년대에 세계 각국을 휩쓸었던 학생운동이 실패한 뒤 젊은이들 사이에 좌절의 기운이 만연했던 시기. 시대에 민감했던 감독들은 체제의 혁명대신 개인의 혁명, 계급과 성을 뛰어넘는 순수한 만남, 성을 매개로 지배체제에서 일탈하려는 욕망 등을 영화에 담아냈다.

◆세기말과 성

길게 보면, 세기말에는 늘 성이 핫이슈였다. 19세기 말에도 퇴폐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데카당스’가 유행했다. 20세기말, 성을 소재로 한 영화에도 ‘세기말적 징후’가 엿보인다. 동유럽 공산체제 몰락 이후 피폐하고 범죄가 들끓는 폴란드를 배경으로 한 ‘샤만카’는 모든 질서와 언어체계, 인간의 이성을 부정하며 억제불가능한 자연법칙으로서 인간의 성적 본능을 역설한다.

보스니아 내전을 연상시키는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시작하는 ‘폴라X’는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사랑을 시작한 이복남매 간의 근친상간을 통해 가족의 개념을 허물어뜨린다.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에서 주인공들은 섹스에 빠져들며 “왜 일을 안하고는 살 수 없나”하고 중얼거린다. 성찰의 기회없이 앞으로 앞으로 가속페달을 밟아온 우리사회에 ‘딴지’를 걸고 있는 것.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는 설치미술가로 ‘거짓말’의 주인공 제이 역을 맡은 이상현(40)은 “독일 빔 벤더스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가 냉전시대의 시였다면 ‘거짓말’은 국제통화기금(IMF) 시대 암울한 한국 사회의 억눌린 심연의 욕구가 분출되는 시”라고 말한다. 그는 “20세기의 끄트머리까지 숨가쁘게 달려 왔지만 삶의 터전까지 무너져 버린 황폐한 사회, 제이는 바로 이 ‘패배한 역사’의 증인”이라면서 “남자들의 ‘빈 곳’을 채워줄 여주인공 와이는 찬 바람 불고 고독한 이 사회에 필요한 천사”라고 주장한다.

윤리와 질서를 내세웠지만 결과는 대량살상과 인간성 파괴로 나타난 20세기. 성을 소재로 한 요즘의 영화들은 그 방향성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근현대의 이데올로기였던 ‘합리적 이성’에 대해 그야말로 ‘밀레니엄 말기적 도전’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김희경기자〉susanna@donga.com

◆'세기말 性' 이렇게 생각

▽김정일박사(정신과전문의)〓재벌도 해체되고 집단의 위력이 약해진 세기말, 내숭떠는 것보다 본능을 발산하고 폭발하는 다양한 체험이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들 것이다.

▽마광수교수(연세대·국문학)〓성은 ‘늘 중요한 것’이다.세기말이라고 뭐가 달라지는가?

▽민용태교수(고려대·스페인문학)〓자유(Liberty)에 가장 가까운 말은 색마(Libertine)다. 20세기말 몸과 성에 대한 탐구는 극단적인 자유의 상징이자, 논리와 남성중심의 진리관이 허물어지고 대신 감성과 여성중심의 사회가 오고 있다는 증거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