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급랭에 시행사들 ‘휘청’… PF대출 부실 우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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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인상-자재값 뛰어 공사비 급증
대출 연장 안되고 추가 대출 못받아

올 초 경기 부천시의 한 대형마트를 4000억 원 가까운 금액에 사들이기로 한 A시행사는 최근 잔금을 못 냈다. 이곳을 주상복합 건물로 개발해 분양에 나설 계획도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대형 시행사여서 자금력이 충분할 것으로 예상됐던 터라 부동산 업계는 이를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A시행사가 잔금 납부에 실패한 건 시장가보다 대형마트를 비싸게 매입했고 사업성도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통상 토지 매입 대금이 부족하면 일시적으로 ‘브리지론(Bridge Loan)’으로 자금을 융통하지만 이마저도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A시행사는 최근 동시에 진행하던 시행사업 3개가 잇따라 비슷한 어려움을 겪으며 현금 유동성이 막혔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기준금리 추가 인상이 유력해 최악의 경우 A시행사는 계약금을 날릴 수 있다”고 했다.

부동산 시장이 급격히 냉각되는 가운데 기준금리 인상과 자재 값 급등에 따른 공사비 부담까지 겹치며 시행업계가 휘청거리고 있다. 사업 초기에 받은 대출이 연장되지 않거나 추가 대출이 안 돼 ‘돈줄’이 막히면서 미리 사들인 토지가 공매로 넘어가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시행사에 자금을 댔던 증권사나 신탁사의 ‘연쇄 부실’ 우려가 커지고 있다.

○ 자금줄 막히며 사업 좌초될 위기 시행사 급증

19일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온비드 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7, 8월 신탁사의 토지 매각 공매(기타일반재산 기준)는 총 341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221건)보다 54.3% 급증했다. 시행사에 대출해 줬다가 사업이 좌초된 뒤 토지 공매로 대출액의 일부라도 회수하려는 신탁사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의미다.

경북 포항시에서 300억 원 규모의 토지를 사들여 건축 인·허가까지 마친 B시행사는 최근 사업이 좌초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토지 매입 자금을 대출로 확보했는데, 다음 달 만기를 앞두고 이를 연장하지도 못했다.

보통 시행사는 부동산 개발 사업 때 토지 매입과 인·허가 과정에서 브리지론을 활용한다. 이후 본격적인 시공 단계에서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을 받아 브리지론을 상환한다. B시행사는 PF 대출을 받으려고 여러 금융사를 수소문했지만 사실상 모두 거절당했다. 대출 이자가 계속 오르고 있고, 공사비도 지난해보다 20∼30% 급등해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만 들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기존 대출을 갚기 위한 ‘대환대출’을 알아봤지만 이마저도 막혀 버렸다.

○ “부동산 호황에 사업성 검토 부실…리스크 키워”

시행사업 관련 브리지론이나 PF 대출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증권사 직원들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통했다. 부동산 경기가 워낙 활황인 데다 이자까지 비교적 낮아 시행사에 대출을 해주면 대부분 부실 없이 회수됐고, 이는 곧 증권사의 이익으로 돌아왔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30대 초중반 과장급 직원들이 연간 1억 원 이상의 성과급을 받는 경우가 흔했다”고 했다.

문제는 당시 사업성 검토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등 대출 심사가 부실하게 이뤄졌다는 점이다. 올 들어 부동산 경기가 빠르게 식자 부실 위기에 놓인 사업지가 급증하면서 당시의 부실 대출 리스크가 드러나고 있다.

C증권사는 지난해 7월 대구 중구의 한 사업장에 내준 대출을 이달 초 디폴트(채무 불이행)로 처리했다. 토지 매입용으로 200억 원가량을 대출해 줬는데, 올해 7월 말 만기에서 한 달이 지나도록 시행사가 돈을 갚지 못했다. C증권사 관계자는 “토지 매입 금액이 시장가보다 20∼30% 비쌌는데 사업성 검토만 확실히 했어도 대출이 나가지 않았을 것”이라며 “디폴트가 발생해도 담당 직원은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무리한 대출이 많이 이뤄졌다”고 전했다.

○ “우량 사업은 자금 숨통 틔워줘야”


금융감독원이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1분기(1∼3월) 증권사의 부동산 PF 대출 연체율은 4.7%로 부동산 시장이 호황이던 2019년 말(1.3%)보다 3배 이상으로 급등했다. 증권사의 부동산 PF 대출 ‘익스포저’(위험 노출) 금액 역시 올해 1분기 28조8436억 원으로 2020년 말(24조5897억 원)보다 17.3% 증가했다. 한 대형 증권사는 현재 진행 중인 PF 대출의 약 20%를 회수 불가능한 악성 채권으로 분류하고 있다.

부동산 PF 부실 우려가 커지자 금융권은 시행사에 대한 대환대출을 전격 금지하는 등 돈줄을 조이고 있다. 제1금융권과 캐피털 업계뿐만 아니라 마지막 보루였던 농협중앙회마저 지난달 말부터 대환대출을 금지한 상태다.

전문가들은 현 상태가 2, 3개월만 이어져도 시행사와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형 증권사의 연쇄 도산 가능성이 커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돈줄이 마른 시행사들이 무너지면 이들 사업에 대출을 해준 증권사들도 손실을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안성용 한국투자증권 부동산팀장은 “연쇄 도산이 현실화되면 시장 전반에 ‘공포’ 분위기가 번지며 부동산 경기가 단기간에 회복되지 못할 정도로 고꾸라질 수 있다”며 “지금이라도 사업성 검토를 제대로 해서 괜찮은 곳들은 대출 만기를 연장해 주거나, 대환대출 금지에 일부 예외를 두는 등 자금줄에 ‘숨통’을 틔워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순구 기자 soon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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