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쉐린의 도시’ 129년 동고동락…시골마을이 글로벌 산업도시로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2월 25일 17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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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부터 미쉐린타이어가 사용해 오던 프랑스 중부 클레르몽페랑의 카타루 부지에선 요즘 학교를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1만3400㎡의 큰 부지에 지어지는 학교의 이름은 ‘홀(hall) 32’. 취업준비생 300명의 교육과 1800명의 직업 재교육을 담당하게 될 이곳은 기존의 학교나 직업훈련 개념을 뛰어넘어 ‘캠퍼스 컴퍼니’(학교 회사)로 불린다. 최첨단 기계와 로봇이 배치되고, 인공지능(AI)을 포함한 미래 제조업의 첨단 정보 습득과 훈련이 이뤄진다. 또 학생과 교수, 기업이 프로젝트별로 자유롭게 의견과 지식을 교환하는 네트워킹을 형성해 새로운 기업 혁신 모델을 개발하는 장이 되도록 할 계획이다.

5년 동안 드는 총 3000만 유로(약 384억 원) 중 미쉐린이 1380만 유로(약 176억 원)를 부담하고 클레르몽페랑이 포함된 오베르뉴론알프스 지역과 국가 은행이 1260만 유로(약 161억 원)를 대는 민관 합작 투자 프로젝트다.

프랑스 국민에게 클레르몽페랑은 ‘미쉐린의 도시’로 유명하다. 1889년 앙드레, 에두아르미쉐린 형제가 클레르몽페랑의 카름 광장 근처에 고무 브레이크 패드를 만들고 농기계와 자전거를 수리하는 회사를 설립한 이후 미쉐린과 클레르몽페랑은 129년 동안 변함없이 한 몸처럼 함께해 왔다.


1895년 세계 최초로 공기주입식 고무타이어를 개발한 미쉐린은 지난해 연매출 219억 유로(약 28조320억 원)을 기록한 글로벌 기업이 됐다. 설립 초 52명이던 직원은 1905년 4000명에 이어 1980년대 3만 명으로 늘었다. 설립 당시 인구 3만 명 수준이던 시골 마을 클레르몽페랑은 1901년 5만2933명, 1926년 11만1711명, 1975년 15만6763명으로 늘며 산업도시로 변모했다.

클레르몽페랑 주민 사이에선 미쉐린과 연을 맺지 않은 가족을 찾기 힘들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 미쉐린 공장은 전투기 2000대를 만드는 생산기지로 변신해 독일에 맞섰다. 타이어 저장창고는 침대 320개가 놓인 병원으로 개조돼 부상한 군인들을 돌봤다. 이 모든 작업은 주민들과 함께 이뤄졌다.

클레르몽페랑시 홈페이지에선 미쉐린박물관에서 진행되는 ‘비벤덤(Bibendum) 탄생 120주년’ 행사 홍보가 한창이다. 비벤덤은 하얀색 타이어로 표현한 미쉐린타이어의 마스코트다. 미쉐린박물관은 2009년 이후 방문객 60만 명이 다녀간 클레르몽페랑의 대표적 관광명소로 뿌리내렸다.


미쉐린이 클레르몽페랑에 지은 럭비 주경기장은 ‘AS 미쉐린 클럽’과 함께 주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경기장이 됐다. 미쉐린은 직원과 주민을 위한 탁아소, 영어와 프랑스어를 함께 쓰는 초·중·고등학교, 전문 직업학교를 운영 중이다. 미쉐린이 지은 교회도 두 곳 있다.

최근 들어 위기도 있었다. 파리에서 400km나 떨어진 지방도시 클레르몽페랑에 본사를 두는 것은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이 미쉐린 안팎에서 제기됐다. 17개국에 68개 공장을 둔 글로벌 기업이 되면서 클레르몽페랑의 미쉐린 직원 수도 1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미쉐린은 올 4월 클레르몽페랑과 함께 새로운 미래 공동 투자방안을 발표했다. 2020년까지 미쉐린이 2000만 유로(약 256억 원), 클레르몽페랑이 800만 유로(약 102억 원)를 공동 투자해 미쉐린 본사를 리모델링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미쉐린은 클레르몽페랑 지역에 1000명을 추가 채용하기로 했다. 특히 디지털, 첨단 기술 연구개발(R&D) 분야의 인력을 늘릴 계획이다. Hall 32 건설도 그 일환이다.

장도미니크 세나르 미쉐린 최고경영자(CEO)는 “프랑스 지방 도시에 글로벌 그룹이 있다는 건 자랑스러운 일로 우린 이곳에 계속 머무를 것”이라며 “미쉐린과 클레르몽페랑은 대도시가 아니더라도 파워풀한 경제, 혁신, 서비스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미쉐린과 클레르몽페랑 사이에 쌓여온 신뢰가 공공-민간 파트너십을 가능하게 했다”며 “지역 주민들에게 최고 수준의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올리비에 비앙시 클레르몽페랑 시장은 “우리는 미쉐린과 과거 함께해 온 가치를 자랑스러워하며 공동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장소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미쉐린은 지역 관광객 유치를 위해 본사의 안내데스크 공간을 현재 200㎡에서 2000㎡로 10배로 늘리고 대형 테라스와 문화행사장, 폭포 분수 등 각종 전시물과 조형물을 배치하기로 했다. 올해 7월부터 시작된 공사 자재의 75%는 클레르몽페랑이 소속된 오베르뉴론알프스 지역에서 쓰고 있으며 공사 인력도 대부분 이 지역 사람들이다.

미쉐린 직원들은 이 지역 학생들과 대부 대모를 맺어 한 달에 4시간씩 만나 직업과 인생 상담을 해주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7개월 전부터 딜랑(21)의 대모 역할을 하고 있는 미쉐린 구매파트 직원 클레르 아르노 씨는 “딜랑이 대학 진학에 실패해 힘들어하는데 그가 직장을 잡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도시와 기업, 브랜드 가치 높여주는 ‘윈윈 전략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기업의 브랜드가 알고 보면 도시 이름인 경우가 프랑스에선 흔하다. 그 도시의 전통적인 자원과 강점을 살려 기업화하면서 도시와 기업이 서로 브랜드 가치를 높여주는 윈윈 전략이다.

대표적인 생수 브랜드 에비앙과 볼빅(볼비크)은 각각 프랑스 동부 알프스 지역과 중부 화산지대에 자리 잡은 도시 이름이다. 오베르뉴 화산지역에서 천연 미네랄워터를 뽑아 만드는 볼빅은 이 지역에서 정보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해마다 4월부터 11월까지 9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 에비앙, 볼빅 등의 브랜드를 소유한 다논은 프랑스에서만 2500명을 고용하고 있다.

글로벌 화장품 기업 로레알이 운영하는 브랜드 비시 역시 프랑스 중부 도시 비시에서 따온 이름이다. 화산과 마그마성 바위 지대에서 생성된 온천으로 유명한 이 지역 물에서는 15종류의 미네랄이 추출된다. 브랜드 비시는 1969년부터 이 온천 근처에 공장을 지어 지금도 이 지역 물로 화장품을 생산하고 있다.

프랑스의 루아르강 근처 마을 지앵과 중부 도시 리모주는 도자기 그릇 브랜드로 유명하다. 지앵은 루아르강 근처의 모래와 진흙, 규토질 자갈을 활용한 도자기 그릇이 오래전부터 유명했다. 영국인이 1821년 이곳에 기업 지앵을 세우면서 프랑스의 대표 브랜드로 발돋움했다.

포크, 스푼, 나이프 등으로 유명한 라기올 역시 프랑스 남부 마을 라기올에서 나온 브랜드다. 1800년대부터 이 지역 주민들이 나무 손잡이에 날카로운 칼날을 장착한 칼과 송곳을 만들면서 유명해지자 1981년 칼 산업을 장려하기 위해 라기올 칼 연합체가 형성됐다. 이 연합체가 여러 공장을 소유하면서 기업화됐다.

프랑스는 정부, 지방자치단체가 전략적으로 대표 기업을 지역 산업으로 육성해왔다. 프랑스 남서부의 대도시 툴루즈는 ‘에어버스’의 도시다. 1965년 강대국들이 한창 달 탐사를 벌일 때 항공기 제조회사 에어버스가 이 지역에 세워진 이후 국가와 툴루즈가 전략적으로 항공 관련 대학, 연구소, 박물관을 잇달아 세웠다. 아울러 항공 관련 디자인, 엔진 부속 제조업 회사 등 유관 기업들이 들어오면서 툴루즈는 전 세계 대표적인 항공, 우주 도시가 됐다.

특히 리옹, 릴, 낭트 등 지방 주요 도시에선 지역 대학 졸업생들의 창업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이 함께 스타트업 기업들을 지원하는 ‘프렌치 테크’ 프로그램이 활성화되고 있다. 인큐베이터와 액셀러레이터 역할은 물론이고 펀드레이징과 네트워킹까지 스타트업 창업의 모든 것을 지원해 프랑스 스타트업의 3분의 2는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 자리 잡는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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