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입김 아래 있는 연금공단 ‘기업 길들이기’ 동원될수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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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 논란]‘주주권 행사 강화’ 섣부른 도입 우려


1500조 원 이상을 굴리는 세계 최대 연기금 일본공적연금(GPIF)은 2014년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했다. 투자 기업의 장기 수익률을 높이는 데 목소리를 내고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시켜 외국인 투자 유치를 확대하겠다는 취지에서였다.

하지만 일본에선 국민연금공단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앞두고 불거진 ‘관치(官治)’, ‘연금사회주의’ 등의 논란이 없었다. GPIF가 주식 운용부터 의결권 행사의 책임과 권한까지 모두 위탁 운용사에 위임해 정부의 입김을 사전에 차단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GPIF를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200개 이상의 기관투자가들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해 ‘책임 투자’ 문화를 뿌리 내리고 있다.

한국도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는 스튜어드십 코드의 순기능을 살리기 위해서는 일본처럼 국민연금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확보하는 장치를 먼저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 “주주가치 훼손 기업 견제” vs “관치 도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의 주주권 행사 강화가 세계적 추세라는 의견이 많다. 이미 미국, 일본, 유럽 등 해외 20개국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했다.

송민경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센터장은 “네덜란드공적연금(ABP)은 스튜어드십 코드를 통해 투자 기업과 연간 260차례 대화할 정도”라며 “주주 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있는 기업을 견제하고 기금 자산을 보호하는 것은 세계적 흐름”이라고 설명했다. 엘리엇과 같은 해외 투기자본이 단기 차익을 노려 국내 기업에 과도한 배당 등을 요구할 때 국민연금이 장기 수익률을 위해 반대에 나서 방패막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선 이 같은 장밋빛 전망보다 국민연금이 관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가장 큰 문제는 국민연금이 정부나 정치권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공단은 보건복지부 산하에 있고 기금 운용의 책임자는 복지부 장관이다. 최고투자책임자(CIO)인 기금운용본부장도 청와대 검증을 거쳐 선임된다.

한 대형 자산운용사의 임원은 “국민연금을 정부의 영향 아래에 둔 채로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주주권 행사 원칙과 방향이 바뀔 수밖에 없다”며 “기업이나 시장의 혼란은 불 보듯 뻔하다”고 지적했다.


국내 기업에 미치는 국민연금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점도 우려를 키운다. 국민연금은 3월 말 기준 국내 주식시장에 약 131조 원을 투자하고 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22일 현재 국민연금이 5%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299개, 10% 이상인 기업도 96개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스튜어드십 코드를 성급하게 도입하면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자칫 재벌 개혁이나 ‘대기업 때리기’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지낸 최광 전 복지부 장관은 “그동안 일부 장관이나 이사장이 개별 기업의 투자 결정에 참여하는 잘못된 관행이 많았다”며 “정부 입김을 차단할 수 없다면 국민연금은 철저히 재무적 투자자의 역할에만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해외 연기금은 ‘외풍’ 차단 장치 마련

한국과 달리 해외 주요 연기금들이 적극적으로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나 정치권의 외풍을 차단할 장치를 갖췄기 때문이다.

캐나다공적연금(CPP)은 정부의 잦은 간섭으로 1990년대 기금 고갈 위기를 맞았다. 그러자 캐나다 정부는 1998년 별도의 공사인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를 설립해 기금 운용의 독립성을 보장했다. 금융·경영 전문가로 구성된 이사회를 구성하고 최고경영자(CEO)의 임기 제한도 없앴다.

유럽 2위 규모 연기금인 네덜란드공적연금(ABP)은 2008년 민간 자회사인 자산운용공사(APG)를 설립해 기금 운용을 맡겼다. 스웨덴공적연금(AP)은 6가지 기금으로 나눠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정부는 외부 회계감사기관을 통해 기금 운용 결과만 보고받는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해외 연기금은 직접투자 비중이 적고 운용의 독립성이 유지되기 때문에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해도 논란이 없었다”며 “국민연금의 의사결정 구조를 독립시키는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조명현 한국기업지배구조원장은 “국민연금도 단기적으로는 주주권 행사를 일본처럼 외부 위탁운용사에 맡기고, 장기적으로는 네덜란드처럼 기금운용본부를 별도 법인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스튜어드십 코드#국민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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