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진단]‘최순실 그림자’를 지우면 보이는 것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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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 경제부 차장
박용 경제부 차장
 외국인 투자가 눈엔 코리아는 남이나 북이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사회다. 500조 원대의 자산을 굴리는 세계 3대 연기금 수장이 하루아침에 수의를 입은 죄인 신세가 됐으니, 그를 만나 투자와 협력을 의논했던 외국인 투자가들은 “제대로 된 나라냐”라며 뒷목을 잡았을 것이다. 지난해 말 박영수 특검의 ‘구속 1호’가 된 문영표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의 추락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골을 더 깊게 했다.

 문 이사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일하던 2015년 7월 국민연금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하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진실은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다. 그 전에 이런 일을 초래한 국민연금의 의사결정 시스템 문제를 짚어 보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해야 한다. 외국인 투자가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먼저 ‘최순실 그림자’를 지우고 이번 일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2015년엔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당시 엘리엇은 합병에 반대하며 한국의 간판 기업인 삼성을 강하게 몰아세웠다. 국익을 위해서라도 합병에 찬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의 말처럼 ‘노’라고 말했다간 ‘이완용’으로 몰릴 수 있는 분위기였다. 국민연금은 투자 수익과 국익을 고려해 의사결정을 하게 돼 있으니 이런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증권가에선 문 이사장의 압력이 없었더라도 국민연금이 합병에 반대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최순실’이나 ‘반(反)엘리엇’ 그림자와 같은 외풍을 차단할 장치가 마련되지 않으면 국민연금 이사장과 기금운용본부장은 교도소 담장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기 투자자인 국민연금이 내린 의사결정을 특정 시점 주가로 평가하는 게 바람직한가도 따져봐야 한다. 2015년 5월 합병 발표 직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주가는 가격 제한 폭인 15%까지 뛰어올랐다. 삼성의 지배구조 불안감이 해소돼 장기적으로 주가에 이득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합병 삼성물산 주가가 급락한 건 지난해 10월 24일 대통령 연설문 수정 파일 등이 담긴 PC의 존재가 알려지고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다. 주가는 이 여파로 10월 25일 연중 최고점을 찍고 추락했다.

 정점을 찍던 날 국민연금의 지분평가액(약 1조8529억 원)은 합병 발표 전 거래일(약 1조8300억 원)보다 오히려 높았다. 국민연금의 평가 손실이 ‘최순실 게이트’의 자기 실현적 예언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식이라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은 주가가 널뛸 때마다 국회나 감사원에 불려 다녀야 한다.

 일각에선 “세계적 의결권 자문 기관인 ISS가 합병에 반대했는데도 국민연금이 찬성했다”라고 비판한다. 이런 주장은 한국 10대 그룹 소속 58개 계열사에 57조 원을 투자하고 있는 국민연금 직원들에게 ‘국익이니 투자 수익이니 신경 쓰지 말고 ISS 결정을 따르는 게 뒤탈이 없다’는 나쁜 인센티브만 준다. ISS는 한국의 국익 따윈 안중에도 없는 민간 자문사일 뿐이다. 국민연금의 벽에 부닥쳐 뜻을 이루지 못한 엘리엇이 요즘 ‘최순실 그림자’ 뒤에서 빙그레 웃고 있을지 모르겠다. 계산기 톡톡 두드리면서.

박용 경제부 차장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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