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증권사 속속 脫여의도… 무색해진 ‘금융1번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7일 03시 00분


코멘트

[토요기획]‘대한민국 최초 신도시’ 여의도 지금은

50년 전 모래밭에서 시작해 한국의 정치 경제를 대표하는 땅으로 도약했던 서울 여의도가 변화의 기로에 섰다. 재도약을 통해 아시아 금융 허브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낙후된 인프라 개선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건혁 기자 gun@donga.com

 “아예 저 섬을 개발해 버리자.”

 1966년 7월 폭우로 잠긴 서울을 헬기로 둘러보던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한강 상공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이렇게 결심한다. 장마 때마다 물난리를 겪지 않게 한강을 개발하자. 저 쓸모없는 섬 주위엔 제방을 쌓자. 둑 안쪽으로 생기는 옥토를 개발하면 ‘새 서울’을 만들 수 있다….

 단순한 공상이 아니었다. 그는 ‘불도저’였다. 실제로 일 년 뒤 ‘한강 정복의 구체안’이 나왔다. 버려진 섬엔 당시로선 첨단 도시의 밑그림이 그려졌다. 지금의 여의도(汝矣島)는 50년 전 이렇게 시작됐다. 압축성장한 대한민국에서 상전벽해(桑田碧海)하지 않은 곳이 있겠나만 여의도만큼 이 말이 잘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버려진 모래톱에 세워진 ‘한국의 맨해튼’ 혹은 ‘한국의 월스트리트’는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이었다. 여의도는 한국 고속 성장의 상징이자 욕망이 응축된 땅이었다. 권력을 꿈꾸는 사람들,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 스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여의도의 몇 배’라는 표현처럼 개발 규모의 척도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여의도 위상은 예전 같지 않다. 여의도를 상징하던 방송사도 증권사도 줄줄이 짐을 꾸렸다. 새로운 도약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 됐다. ‘대한민국 최초 신도시’ 여의도 개발의 반세기를 되돌아봤다.

모래톱 위에 세운 고층 도시의 꿈

1968년 완공된 여의도 윤중제 전경. 동아일보DB
1968년 완공된 여의도 윤중제 전경. 동아일보DB
 한강의 퇴적작용으로 겹겹이 모래가 쌓여 생긴 섬인 여의도는 황무지였다. 섬 이름이 “너나 가져라”라는 의미의 한자 합성어인 ‘여의도(汝矣島)’로 지어졌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조선시대에는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이용됐다. 일제강점기엔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이 들어섰다.

 여의도가 현재 모습으로 바뀐 것은 1967년 9월 22일 서울시의 ‘한강개발 3개년 계획’부터다. 한강변에 74km의 강변도로를 만들고, 여의도 둘레에 석축 제방을 쌓아 6층 이상의 빌딩만 들어서는 고층 도시를 건설한다는 구상이었다.

 ‘버려진 한강의 정복’을 내걸고 그해 12월 27일 윤중제 공사가 시작됐다. 1968년 2월 하구를 넓혀 한강 물이 잘 빠지게 하기 위해 밤섬을 폭파했다. 제방 공사는 군사작전을 치르듯 속전속결로 진행돼 그해 6월 끝났다. 윤중제 완성으로 2.9km²의 금싸라기 땅이 생겼다.

 1969년 건축가 김수근 씨가 내놓은 개발계획은 어마어마했다. 3개 축으로 나눠 서쪽에 국회와 외교단지, 동쪽에 대법원과 서울시청, 가운데에는 업무·주거시설을 배치했다. 업무지구를 둘러싸고 보행자용 인공 덱을 배치하는 것. 당시로서는 첨단 입체 도시였다.

 하지만 이런 도시를 건설하기엔 한국의 재정은 초라했다. 계획은 현실적인 방향으로 수정됐다. 결정적으로 여의도를 동서로 가르는 ‘동양 최대’의 5·16광장(현 여의도공원)이 만들어지면서 계획은 뒤틀렸다. 여의도 개발의 실무 책임자였던 고 손정목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의 회고록에 소개된 당시 상황이다. “1970년 10월 말 여의도에 대광장을 만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내려졌다. 이 광장이 ‘전시 비행장’임을 알게 된 것은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그제야 ‘양(택식) 서울시장 이마처럼 훤하게 포장만 하라’는 속뜻을 알 수 있었다.”(손정목·‘서울도시계획이야기2’·한울)

 1971년 10월 시범아파트가 건립되면서 본격적인 고층 아파트 시대가 열렸다. 당시 국내 아파트 최고층인 12층으로 아파트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주택청약 제도가 처음 도입된 1977년 목화, 화랑 아파트 분양은 각각 45 대 1, 70 대 1이라는 경쟁률을 보이며 한국 최고 아파트단지의 명성을 쌓았다. 여의도 서울아파트는 1980년 최초로 ‘억대 아파트’ 시대를 열기도 했다.

‘동양 최대’ 뽐내던 정치-경제-문화 1번지

1971년 준공된 여의도 시범아파트. 국가기록원 제공
1971년 준공된 여의도 시범아파트. 국가기록원 제공
 여의도 개발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대규모 아파트단지뿐 아니라 훗날 여의도를 상징하는 건물들이 연이어 들어섰다. 1975년 9월 지하 2층, 지상 6층(높이 70m)에 연면적 8만1443m2의 ‘동양 최대’ 국회의사당이 준공됐다. 민의의 전당이 돼 달라는 기대는 채우지 못했다.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새 의사당에서 열린 첫 대정부질문에서 “육중한 석조건물의 무게가 우리의 의회정치를 짓누르는 것으로 느껴진다. 오늘의 심각한 정치 부재를 슬퍼한다”고 말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비감(悲感)은 여전하다.

 1979년 7월에는 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가 개장하면서 자본시장의 중심이 명동에서 여의도로 옮겨 갔다. 이후 대우증권(현 미래에셋대우)을 필두로 대신·신영·한양증권 등이 잇달아 서울 여의도 34번지에 터를 잡았다. 1990년대 중반에는 여의도공원 쪽으로까지 증권가가 확장되면서 ‘한국의 월스트리트’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1976년 KBS, 1979년 동양방송, 1982년 MBC가 여의도에 자리 잡으면서 방송·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위상도 얻게 된다. 주부 김하영 씨(40)는 “어릴 때 라디오에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우체국 사서함 ○○○호’라는 말을 들을 때 가슴이 뛰었다”며 “서울에 올라가면 혹 연예인을 볼 수 있을까 싶어 방송국 앞을 기웃거리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광장과 의사당에 이어 동양 최대라는 이름값의 정점은 1985년 5월 완공된 63빌딩(현 한화 63시티)이 찍었다. 지하 3층, 지상 60층, 높이 249m로 일본 도쿄(東京)의 선샤인 빌딩(240m)을 제치고 아시아 최고층 마천루가 됐다. 감히 ‘세계 최고’를 노리기는 버겁던 시절 동양 최고라는 수식어는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자랑이었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는’ 서울의 배경엔 63빌딩이 빠지지 않았다. 이후 1987년 ‘럭키금성트윈타워’(현 LG트윈타워·34층) 등 초고층 건물들이 연이어 올라갔고, 1990년대 중반에는 초고층 재건축 경쟁이 벌어졌다.

‘새 간판’ 필요한 여의도

 하지만 1990년대부터 ‘최고’ ‘첨단’의 간판은 여의도에서 강남으로 옮겨 가기 시작한다. 강남은 1988년 삼성동 무역센터빌딩(55층), 2005년 도곡동 타워팰리스 3차(69층) 등으로 고도를 높였지만 여의도는 제자리걸음이었다. 정보통신 및 금융 기업들이 강남구 테헤란로와 경부(京釜) 축 신도시에 자리 잡으며 ‘경제 1번지’ 타이틀도 무색해졌다.

 2000년대 중반 다시 여의도에 기회가 왔다. 2007년 ‘금융중심지의 조성과 발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서울국제금융센터(IFC)를 중심으로 ‘아시아 금융허브’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007년 발표된 서울시의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도 여의도 주변 개발에 집중됐다. 상업시설과 교통 등 인프라가 대대적으로 확충돼 여의도의 가치가 치솟을 것이란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여의도는 다시 빛을 잃어갔다. 5일 부동산업체 교보리얼코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7∼9월) 말 기준 여의도의 공실률은 9.15%로 강남권(7.89%), 종로 을지로 등 도심권(9.08%)보다 높다. 특히 대기업 등이 주로 입주하는 프라임급 오피스 빌딩의 공실률은 15.08%로 도심권(8.45%), 강남권(7.16%)을 크게 웃돌고 있다.

 짐을 싸는 금융회사들이 늘어나자 증권업계에서는 ‘모래밭에 바람이 센 땅이라 돈을 모으기 부적합하다’는 풍수적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이 재물의 기운이 모이는 곳을 골라 여의도가 아닌 을지로를 본사로 정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지어진 지 40년 안팎의 아파트 재건축도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양지영 리얼투데이 리서치실장은 “삼부·시범아파트를 제외하면 용적률이 높아 사업성이 떨어지고 가구별 지분이 천차만별이라 재건축이 지지부진하게 추진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동산업계는 최근 새 빌딩과 복합상업시설이 들어서는 점에 기대를 걸고 있다. 박진순 한림건축 대표는 “여의도에 파크원 등 대규모 복합문화공간과 컨벤션센터, 외국인학교 등이 들어서면 아시아 금융허브에 재도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영 redfoot@donga.com·이건혁/세종=천호성 기자  
#여의도#증권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