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이 한줄]인생 길 헤매는 사람들… 좀 더디 가면 달라질까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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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가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나보다 빨리 달리는 사람들이 앞서 간다고도 생각지 않고요.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이석원·그책·2015년)

그땐 저녁이면 종종 술을 마셨다. 학교 근처 허름한 감자탕집이나 쪽문 옆 건물 2층 맥줏집이 주무대였다. 주제는 주로 연애나 세상 얘기. 여자친구의 이별 통보에 “죽고 싶다”던 친구를 토닥였고, “나쁜 ○”이라며 함께 욕하기도 했다.

모든 걸 다 아는 듯 주절댔지만 20대 초반 풋내 나는 사내들이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법적 성인일 뿐 여전히 용돈을 받았고 취업 준비에 목매는 ‘독립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일까, 맥줏집 스피커에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흘러나오면 빨리 서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서른에는 자기 의지대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관계맺음은 능숙해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서른을 훌쩍 너머 마흔을 앞뒀지만 여전히 관계맺음은 어렵고 서툴기만 하다. 연애도, 친구 사귀기도 마찬가지다. 생각은 통장 잔액만큼 많아졌지만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그만큼 어려워졌다. 20대 격한 포물선을 그리며 요동쳤던 감정은 그대로다. 다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드러내지 못할 뿐이다.

‘남들은 별일 없이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우리만 아직까지 이렇게 헤매고 있을까.’

모던 록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보컬 이석원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가 지난해 발표한 산문집 ‘언제 들어도 좋은 말’에는 마니아층이 탄탄한 가수 이석원이 아닌 관계맺음에 서툰 이석원이 나온다. 구릿빛 얼굴과 긴 머리, 쌍꺼풀을 지닌 여자에 흔들리고 겉으로는 담담한 척하지만 그녀의 문자메시지 한 통에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남자. 그는 스스로 “늘 틀리면서도 매번 같은 답을 적는, 어쩔 수 없는 관계의 열등생”이라고 고백한다.

책 속 이야기가 실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겉으론 괜찮다 하면서도 남들에게 뒤처진 것 같아 늘 조바심을 내는 이들에게 그의 고백은 큰 위안이 된다. 이석원의 얘기처럼 인생은 경주(競走)가 아니라 혼자서 조용히 자신만의 화단을 가꾸는 일이니까.

박창규 기자 kyu@donga.com
#느림#빠름#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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