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esign]‘0.6초’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28일 03시 00분


코멘트

CEO와 디자인경영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소비자 한 사람이 진열대를 돌아다니면서 30분 동안 3만 개의 상품을 둘러본다. 철저히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고객의 마음을 끌지 못하면 상품을 팔기 어렵다.”

2005년 4월 14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0.6초 디자인 승부론’을 화두로 꺼내들었다.

이 회장은 삼성그룹 주요 사장단을 모아놓고 “삼성 제품 디자인 경쟁력은 1.5류”라고 질책하며 “제품이 0.6초 만에 고객의 발길을 붙잡지 못하면 마케팅 싸움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삼성 “先디자인 後개발”


루크 동커볼케 현대차 디자인센터장, 피터 슈라이어 현대기아차 디자인총괄 사장, 맨프레드 피츠제럴드 제네시스 브랜드 전략담당 전무, 어윈 라파엘 현대차 미국법인(HMA) 제네시스 브랜드 담당(왼쪽부터)이 ‘2016뉴욕모터쇼’에서 공개된 4도어 스포츠 세단 ‘뉴욕 콘셉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제공
루크 동커볼케 현대차 디자인센터장, 피터 슈라이어 현대기아차 디자인총괄 사장, 맨프레드 피츠제럴드 제네시스 브랜드 전략담당 전무, 어윈 라파엘 현대차 미국법인(HMA) 제네시스 브랜드 담당(왼쪽부터)이 ‘2016뉴욕모터쇼’에서 공개된 4도어 스포츠 세단 ‘뉴욕 콘셉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제공
‘밀라노 선언’ 이듬해인 2006년 삼성전자는 ‘디자인 혁명의 해’를 선언하고 강력한 디자인 정책을 펼쳐 나갔다. 그해 삼성전자는 와인잔을 형상화한 혁신적인 디자인의 ‘보르도 TV’를 출시해 시장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삼성은 16개월 만에 보르도 TV 500만 대를 판매해 TV사업을 시작한 지 34년 만에 글로벌 TV시장에서 처음 1위로 올라서는 기염을 토했다. ‘먼저 디자인하고 디자인에 맞춰 개발하라’는 ‘선(先)디자인, 후(後)개발’ 체제가 이룬 성과였다.

이처럼 디자인에 대한 기업 수장의 관심은 제품 경쟁력을 단기간에 높이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기술과 품질 격차가 좁혀지고 가격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이제는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디자인이 제품을 차별화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2015 롯데 마케팅 포럼’ 행사장에 마련된 패키지디자인 전시회에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오른쪽)이 폴 로디시나 AT커니(AT Kearney·글로벌컨설팅회사) 명예회장에게 롯데제품의 패키지 디자인 등 관련 내용에 대해설명하고 있다. 롯데그룹 제공
‘2015 롯데 마케팅 포럼’ 행사장에 마련된 패키지디자인 전시회에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오른쪽)이 폴 로디시나 AT커니(AT Kearney·글로벌컨설팅회사) 명예회장에게 롯데제품의 패키지 디자인 등 관련 내용에 대해설명하고 있다. 롯데그룹 제공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이건희 회장의 디자인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출시된 삼성 스마트폰 ‘갤럭시S7’은 실용주의가 더해진 그의 디자인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 포브스지는 갤럭시S7에 대해 “실용성과 디자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고 호평했다.

“고객 열광시킬 디자인 만들라”


디자인을 향한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애정도 각별한 것으로 업계에서 유명하다. 구 회장은 평소 직원들에게 “단순히 보기 좋은 디자인이 아닌 고객의 마음을 얻을 수 있고 사용하기 편리한 디자인”을 만들라고 강조한다. 구 회장은 해마다 LG전자 디자인센터·연구소를 방문해 신제품의 버튼 하나하나까지 꼼꼼하게 디자인을 점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 회장은 연초 신년사에서 “상품 기획부터 마케팅까지 모든 단계는 고객이 열광하고 감동하는 가치를 제공하는 데에 철저히 맞춰져야 한다”며 디자인 혁신을 강조했다. 특히 생활가전에 대해 구 회장은 2012년 LG전자 금형기술센터 준공식에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정교하게 디자인해 완성도를 높이고 실제 주부들이 사용할 때 편리한 디자인을 지속적으로 개발하라”고 주문했다.

유통-화장품업계 오너들의 ‘디자인 경쟁’

아모레퍼시픽의 이미지를 담은 글꼴인 ‘아리따3.0’아모레퍼시픽 제공
아모레퍼시픽의 이미지를 담은 글꼴인 ‘아리따3.0’아모레퍼시픽 제공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품질이 나쁘면 예선전에서 탈락이고 디자인은 결승전과 같다”며 “디자인은 기업이 추구하는 본래의 가치를 담아야 한다”는 확고한 디자인 철학을 가지고 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이마트의 자체 브랜드(PL) ‘노브랜드’가 바로 정 부회장의 디자인 철학을 효과적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노브랜드’는 포장과 디자인은 물론이고 상품명까지 최소화해 간결하지만 상품이 말하고자 하는 특징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극도로 절제된 디자인에 시장 반응도 뜨겁다. 특히 노브랜드 감자 칩은 출시 5개월 만에 200만 개 넘게 팔리며 제과업계에서는 ‘노란 혁명’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롯데제과 주요 제품의 디자인을 직접 챙긴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인기 제품과 프리미엄 브랜드 제품은 디자인 시안을 신 회장이 직접 확인하는데 포장 색상과 글씨 크기, 로고 위치까지 세세하게 조언을 한다”고 밝혔다.

화장품 분야에서는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디자인 경영 선봉장’으로 유명하다. 경영자가 되지 않았다면 미술평론가가 됐을 거라고 말할 정도로 미술에 조예가 깊은 서 회장은 국내외 출장을 다니며 얻은 아이디어들을 브랜드 디자인에 접목시키고 있다. 화장품 편집숍 ‘아리따움’ 매장과 ‘설화수 플래스십 스토어’는 예술적인 감성을 중요시하는 서 회장의 디자인 안목이 담겨 있다. 아모레퍼시픽 관계자는 “서 회장이 ‘매력적인 매장’을 만들라고 직접 제안하면서 간판부터 공간 디자인까지 전반적인 개선 작업이 이뤄졌다”고 전했다.

‘슈퍼 디자이너’ 영입 위해 ‘삼고초려’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은 기아차 사장이던 2006년 기아차를 살릴 승부수로 ‘디자인 카드’를 꺼내들었다. ‘세계 3대 디자이너’로 알려진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하기 위해 당시 정 부회장은 유럽까지 찾아가 끈질기게 설득했고 그를 디자인 총괄 책임자로 데려온 뒤에도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슈라이어는 국내뿐 아니라 미국, 유럽, 일본 등 해외 디자인센터를 총괄하며 특색이 없던 기아차에 ‘패밀리룩’을 그려냈다. 그 결과 기아차는 쏘울, K시리즈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면서 적자 신세에서 벗어나 영업이익을 조 단위까지 끌어올리는 ‘기적’을 이뤄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디자이너를 적극적으로 영입한다는 그의 방침은 2009년 현대차 부회장으로 승진한 뒤에도 이어졌다. 2011년 BMW 핵심 디자이너인 크리스토퍼 채프먼, 지난해 벤틀리 수석디자이너 출신 루크 동커볼케를 영입하며 현대차는 브랜드 경쟁력을 빠르게 끌어올렸다.

삼성도 디자이너 영입에 심혈을 기울이며 최고급 대우를 해주는 것으로 정평이 났다.

2014년 경쟁사인 애플의 수석디자이너 출신 팀 거젤을 소매판매부문 부사장으로 영입한 데 이어 독일의 대표적인 디자이너 펠릭스 헤크를 삼성전자 유럽 디자인연구소장으로 임명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스타 디자이너’ 외에도 삼성전자 소속 디자이너는 현재 1300여 명. 단일 회사의 디자인 조직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디자인경영센터와 미국, 인도, 영국 등 6곳의 해외 디자인 연구소에 소속된 삼성 ‘디자이너 군단’은 삼성 갤럭시 노트, 셰프 컬렉션 등에서 차별화된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정민지 기자 jmj@donga.com
#it\'s design#ceo#디자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