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95주년]생큐, 산업 代父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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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1세대 기업인들 ‘경제報國’… 고도성장 초석 다져

이병철, 정주영, 최종건, 구인회(왼쪽부터) 등 국내 대기업 창업 1세대들은 한국이 세계 13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각 그룹 제공
이병철, 정주영, 최종건, 구인회(왼쪽부터) 등 국내 대기업 창업 1세대들은 한국이 세계 13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각 그룹 제공
올해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다. 광복은 한국 경제사에서도 매우 큰 변곡점이 됐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부흥했기 때문이다.

이병철(삼성), 정주영(현대), 구인회(LG), 조중훈(한진) 등 일제강점기에 사업가로서 역량을 쌓아가던 젊은 창업가들은 광복을 계기로 본격적인 사업 확장에 나섰다. 최종건(SK), 김종희(한화), 박인천(금호)은 광복과 동시에 사업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같은 시기 신격호(롯데)도 일본에서 화장품 사업에 나섰다. 오늘날 한국 경제의 주역들이 광복과 동시에 일제히 출발선상에 섰던 셈이다.

그동안 이들 기업은 끊임없는 도전에 직면해 왔다. 수많은 경쟁자들이 쓰러져 가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전진에 전진을 거듭했다.

○ 4대 그룹의 태동

현재는 세계시장에서 글로벌 기업들과 자웅을 겨루고 있지만 국내 대기업의 시작은 예외 없이 초라했다.

이병철은 1938년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 825m2(약 250평) 남짓한 점포를 산 뒤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당시 자본금은 3만 원이었다. 훗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이 상점은 대구 지역 청과류와 포항 지역 건어물을 만주와 중국에 수출해 이윤을 남겼다. 이병철은 이듬해 조선양조를 인수해 상당한 돈을 벌었다. 이때의 경험은 광복 후 1948년 삼성물산공사,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 등을 잇달아 창업하는 공격적 사업 확장의 자양분이 됐다.

1940년 20대 청년이 서울 아현동 고개에 있던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 공장을 인수했다. 정주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공장을 잃은 그는 동대문구 신설동에 아도서비스를 다시 차렸다. 그러나 일제의 기업정비령에 따라 이 공장마저 1년 만에 일진공작소에 강제 합병됐다. 정주영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중구 초동에서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창업했다. 현대그룹의 탄생이었다.

LG는 1947년 만들어졌다. 구인회는 1931년 경남 진주에서 동생 구철회와 함께 시작한 ‘구인회포목상점’을 통해 자금을 축적했다. 광복과 함께 새로운 사업 기회를 모색하던 구인회는 1947년 락희공업화학을 설립하고 크림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구인회는 “크림 백 통 가운데 불량이 한 통만 섞여도 아흔아홉 통 모두가 불량인 것처럼 취급당한다. 파는 데만 정신을 쏟을 것이 아니라, 한 통이라도 좋은 물건을 만들어서 신용을 쌓는 일이 더 중요하다”면서 품질 관리에 매진했다. 이는 곧 대성공으로 이어졌다.

최종건의 SK는 시작이 조금 달랐다. 1944년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그는 경기 수원에 있던 선경직물공장에 견습기사로 입사했다. 광복 후에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적산기업(일제가 남긴 기업) 관리인으로 선정돼 실질적으로 회사를 이끌었다. 전쟁으로 불탄 선경직물을 최종건이 완전히 인수한 것은 전쟁이 끝난 1953년이었다.

○ 과감한 투자로 승승장구

1950∼1953년 6·25전쟁과 이후 빚어진 정치적 혼란, 1970년대 석유 파동, 1997년 외환위기 등은 기업들로서는 존폐를 걱정해야 했던 고비였다. 그러나 기업들의 선택은 늘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한 공격적 투자였다. 각 기업들의 현재는 그런 결정적 장면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삼성에는 1969년 삼성전자공업의 설립과 1983년의 반도체사업 진출이 그랬다. 현대로선 1972년 현대중공업 창립과 1976년 국내 첫 자동차 고유모델인 포니 생산이 같은 의미를 가진다. SK는 1980년 유공 인수와 1994년 이동통신사업 진출을, LG의 경우 1958년 한국 최초의 전자업체인 금성사 설립과 1999년 네덜란드 필립스와 디스플레이 합작사를 만든 것을 꼽을 수 있다. 이 선택들은 결과적으로 기업 성장의 가장 큰 디딤돌로 기록됐다. 그러나 당시에는 ‘무모한 도전’이라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주영의 조선소 건설이다. 그는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모래사장 사진과 지도, 그리고 영국의 한 조선소에서 빌린 26만 t급 유조선 도면만으로 그리스 선주로부터 유조선 2척을 수주했다. 현대는 조선소 건설과 유조선 건조를 동시에 해냄으로써 세계 조선의 역사를 새로 썼다. 고작 10년 남짓 지난 1983년 현대중공업은 선박 건조량 기준으로 세계 1위에 올랐다.

○ 후대 경영인들의 활약


아버지나 형의 기업가정신을 물려받은 후대 경영인들은 훨씬 더 과감하게 사세를 확장했다. 이병철이 후계자로 낙점한 이건희는 1987년 취임 당시 “삼성을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공언했다. 그러고 그 약속을 지켰다. 삼성은 이제 TV, 휴대전화, 메모리반도체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판매하는 회사가 됐다. 1998년 현대자동차그룹을 맡은 정몽구는 10여 년 만에 글로벌 ‘톱5’ 자동차브랜드로 키워냈다. 2013년에는 현대제철 3고로를 완공해 아버지가 못다 이뤘던 일관제철소의 꿈을 실현하기도 했다.

1973년 SK 2대 회장에 오른 최종현은 석유화학과 정보통신이라는 양대 축을 통해 회사를 재계 3위 그룹으로 이끌었다. 1975년 석유화학사업에 진출할 당시 “언제까지나 기술 선진국이 용도 폐기한 기술을 비싸게 사들이며 그들의 뒤만 따라갈 수는 없다. 나는 한국인의 가능성과 저력을 믿는다”며 임직원들의 반발을 잠재우는 용단을 보여주기도 했다.

LG 역시 2대 구자경과 3대 구본무로 가업이 승계되는 동안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10년 이상 투자해온 2차 전지 사업이 2005년 2000억 원 이상 적자를 냈음에도 구본무가 “끈질기게 하다 보면 꼭 성공하는 날이 올 거다.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고 했던 것은 한국 기업들의 뚝심을 가장 잘 대변해 준다.

글로벌 경쟁이 격화하는 만큼 이들 앞에 놓인 도전과제는 훨씬 무거워졌다. 기업들은 변화를 넘는 혁신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지난 70년간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거듭 강조하고 싶다. 기업은 결코 영원한 존재가 아니다. 변화에의 도전을 게을리하면 기업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단 쇠퇴하기 시작하면 재건하는 것은 지난하다.’(삼성 창업자 이병철 자서전 ‘호암자전’ 중에서·1986년)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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