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서 산 새 옷-신발, 5년 지난 재고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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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업계, 난해한 ‘로트번호’로 제조일자 감추기 꼼수

주부 심모 씨(58)는 최근 서울 시내에 있는 한 백화점 S브랜드 매장에서 가죽운동화를 샀다.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 밑창이 떨어지고 가죽이 닳아 있었다. 백화점을 다시 찾은 심 씨는 점원에게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운동화가 출시된 지 5년이 지난 제품이며, 보관 창고에 오래 쌓아두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는 것. 새것으로 교환받기는 했지만 심 씨는 속아서 재고품을 구매한 것 같아 언짢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제조한 지 여러 해가 지난 섬유·가죽 제품이 의무 표기사항인 제조일자를 명시하지 않은 채 백화점 매장에서 버젓이 팔리고 있다. 제조일자를 표기한 제품이라 할지라도 바코드나 직원들만 알아볼 수 있는 ‘로트번호’(알파벳·숫자 조합)로 대체한 경우가 많다. 당연히 백화점은 신제품만 파는 줄 알고 산 소비자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

13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기술표준원이 소비자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도입한 가죽 및 가정용 섬유제품 제조일자 표시제도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문제가 되고 있다. 기술표준원은 2007년과 2010년 각각 가죽과 섬유제품에 대한 제품일자 표시를 의무화하는 안전·품질표시 고시를 발표했다.

하지만 규정 준수 여부에 대한 단속이 실효가 없는 데다 패션업계의 반발로 제조 연월일을 바코드나 QR코드, 로트번호 등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해 애꿎은 소비자 피해가 계속되고 있다. 기술표준원은 제조 연월일 표기를 하지 않은 업체들에 1차례 시정명령을 내린 후 추가로 적발되면 과태료를 부과한다. 그렇지만 정보공개 대상이 아니어서 소비자는 어느 브랜드에서 제조일자를 표기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지금도 패션업계는 제조일자 표기를 강요하는 것은 지나친 규제라며 반대하는 입장이다. 시즌 상품을 미리 제조해 두었다가 유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소비자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주상호 한국패션협회 상무는 “업체 입장에선 브랜드 이미지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한 만큼 업체들이 알아서 하도록 남겨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제조일자 표기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서문호 건국대 섬유공학과 교수는 “가공된 섬유·가죽제품은 3, 4년이 지나면 형태나 재료의 구조가 변형될 가능성이 높다”며 “특히 보관상태에 따라 그 정도가 심해질 수 있기 때문에 소비자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그에 따라 구매 여부를 판단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도 가용 수명이 짧아진 경우도 많다.

가장 큰 문제는 오래된 물건을 팔면서도 ‘소비자가 모르고 가져가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나오는 업체들의 태도다. 할인매장이 아닌, 백화점 상설매장에서 오래된 물건을 신상품인 양 파는 사례도 흔하다. 기자가 실제 백화점 매장을 살펴본 결과 제조일자 표기 부분에 세일 가격표를 덧붙여 알아볼 수 없게 한 경우도 있었다. 한 매장에서는 세일 상품의 제조일자를 확인해 달라고 하자 점원이 “이월 상품인데 뭘 바라느냐”며 되레 큰소리를 쳤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비자가 오래된 재고라는 걸 알고도 세일 가격에 샀다면 괜찮지만 제조일자를 모르는 상황에서 오래된 재고를 사는 것은 불합리하다”며 “소비자의 확인이 어려운 바코드나 QR코드 표기 등은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김리안 인턴기자 연세대 법학과 졸업
#로트번호#의류 제조일자#백화점 재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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