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 풀린 전월세]<下>준비 없이 닥친 월세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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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자들 눈물, 집주인도 한숨

회사원 황모 씨(45)는 2009년 말 자녀교육 문제로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전세금 2억4000만 원짜리 아파트로 이사했다. 2년 뒤 전세금이 1억 원 가까이 뛰자 집주인은 “전세금을 6000만 원만 올릴 테니 오른 금액을 월세 50만 원으로 달라”고 했다. 다른 전셋집을 찾기 힘들었던 황 씨는 그렇게 반(半)전세살이에 들어갔다. 연말 재계약을 앞두고 집주인은 월세 30만 원을 더 올려달라고 연락해 왔다. 월세가 80만 원으로 늘면 매달 내는 은행 대출이자까지 합해 황 씨 월급의 3분의 1이 고스란히 사라진다. 6년간의 유학생활 끝에 지난해 9월 한국에서 직장을 잡은 이모 씨(37). 한국도 월세가 많이 늘었다는 얘기를 듣고 전세를 놨던 본인 소유의 서울 중구 신당동 전용 59m² 아파트를 월세로 돌렸다. 보증금 5000만 원에 월세 110만 원이었다. 웬만한 펀드보다 높은 수익에 만족한 것도 잠시, 요즘 이 집 때문에 이 씨는 속병이 들었다. 세입자가 연체를 반복하더니 이제 전화마저 피하고 있다. 그는 “미국에서는 임대 전문관리회사가 월세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처리해 줬는데 한국은 관련 제도나 환경이 너무 미흡하다”고 말했다.

준비 없이 닥친 ‘월세 시대’에 주거비 부담으로 고통 받는 세입자도, 제도 허점에 노출된 집주인도 괴롭다. 전문가들은 빠르게 확산되는 월세가 원활하게 정착될 수 있도록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전세 매물은 없고 월세만 늘어”

현재 거래되고 있는 전월세 주택 10채 가운데 4채는 이미 월세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30∼35% 수준이던 월세 비중은 올 1월 처음으로 40% 선을 돌파한 뒤 40%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오피스텔, 다가구·연립주택에 비해 월세 비중이 낮았던 아파트도 1월 30%를 넘어선 뒤 계속 최고치를 깨고 있다. 9월 아파트 월세 비중은 34.2%로 관련 통계가 나오기 시작한 2011년 이후 가장 높았다.

국토부 전월세 거래 통계는 동주민센터에서 확정일자를 받은 전세와 반전세(보증부 월세)만 집계한 것이어서 확정일자를 받지 않은 계약까지 포함하면 실제 월세 비중은 더 클 것으로 보인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이희순 사랑공인중개사 대표는 “전세 매물은 없고 월세만 늘다 보니 연초 7 대 3 정도였던 전월세 비율이 이제 거의 5 대 5까지 됐다”고 전했다.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가 낮고 저금리가 장기화되면서 집주인들의 월세 전환 움직임은 더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박기정 한국감정원 부동산분석부 연구위원은 “2010년 이후 전월세 차이가 급격히 줄었는데 내년이나 후년이면 월세가구 비중이 전세보다 더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문제는 세입자들이 반강제로 월세로 밀려나면서 주거비 부담이 급증했다는 점이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9월 현재 정기예금 금리 기준으로 전국 월세주택의 평균 주거비용은 연간 951만 원으로 전세(370만 원)보다 2.5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서울은 월세가구의 평균 주거비가 연 1593만 원인 반면 전세는 670만 원에 불과하다.

김덕례 주택금융공사 책임연구원은 “목돈을 내지만 돌려받는 전세와 달리 월세는 매달 돈이 나가기 때문에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며 “지금처럼 경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 월세를 내면 가처분소득이 줄어 소비 위축, 내수경기 침체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진단했다.

○“월세 관련 금융상품, 관리회사 필요”

집주인도 편하지만은 않다. 월세 연체와 공실 위험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등 외국에서는 세입자가 월세를 연체하면 보증회사가 대신 집주인에게 돈을 주는 ‘임대료 보증상품’이 보편화돼 있다. 또 임대관리회사가 집주인에게 시세의 90% 수준으로 수익을 보장하는 대신 월세 주택을 관리하고 공실 위험까지 떠안는 임대관리업도 활성화돼 있다.

이상영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외국은 보증금이 월세 금액의 두 달 치 정도인데 한국은 30∼50개월로 높아 세입자에게 월세는 월세대로, 보증금은 보증금대로 부담”이라며 “월세가 연체됐을 때 이를 보완하는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내년 2월부터 국내에도 ‘기업형 주택임대관리업’이 본격 도입되지만 실속 있는 지원책이 없어 벌써부터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서용식 플러스엠파트너스 대표는 “임대관리회사의 자본금 기준이 높고 법무사 회계사 같은 전문가를 의무적으로 둬야 하는 등 진입 장벽이 높다”며 “법인세 같은 세제 지원이 전혀 없어 고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규정 우리투자증권 부동산연구위원은 “확정일자 신고 들어온 것 외에 월세 주택 현황을 파악한 통계도 없어 문제”라며 “기본적인 통계가 뒷받침돼야 지역별, 상품별로 체계적인 월세 지원이나 운영관리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기정 연구위원은 “국내 임대주택의 80% 이상을 민간에서 공급하고 있는데 이들이 임대사업자로 등록할 수 있도록 세제 혜택을 늘려야 한다”며 “그래야 월세는 물론이고 치솟는 전세주택의 공급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정임수 imsoo@donga.com·김준일 기자
#전세 매물#월세#금융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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