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으로 마닐라 停電 막은 ‘발전소 슈퍼맨’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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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인 최초 ‘GE아카데미 멤버십’ 회원… GE코리아 이용범 상무

이용범 GE코리아 상무는 8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GE코리아 본사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엔지니어들도 항상 고객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제대로 된 해결책을 가장 적절한 시점에 제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이용범 GE코리아 상무는 8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GE코리아 본사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엔지니어들도 항상 고객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제대로 된 해결책을 가장 적절한 시점에 제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미스터 리, 바로 필리핀 마닐라행 비행기를 타세요. 이유는 e메일로 보낼 테니 가는 도중 열어보시고요.”

태평양 건너의 한 남자가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뚜∼, 뚜∼’ 소리만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은 뒤 눈을 떴다. 오전 2시였다. 그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듯 간단히 샤워를 하고 주섬주섬 짐을 꾸렸다.

마닐라 공항에 오후 1시가 조금 넘어 도착했다. 발전소에서 나왔다는 두 남자가 인근 헬기장으로 그를 안내했다. 정글 위를 40분 넘게 날아 600메가와트(MW)급 복합 화력발전소에 도착했다. 신형 가스터빈이 설치된 지 5년 정도 된 발전기였다. 이날 새벽 부품 이상으로 자동 ‘셧다운’이 됐다고 했다. 발전소장은 그에게 “무조건 오후 9시에는 발전기를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필리핀의 경우 낮 시간에 전력 수요가 몰리는 한국과 달리 유흥가 전력량이 급증하는 밤 시간에 전력난이 심각하기 때문이었다.

발전기를 돌리는 로터 안의 스프링 48개가 노화돼 탄성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였다. 부품을 신청하더라도 밀림 속 현장까지 오려면 꼬박 하루는 필요했다. 데드라인인 오후 9시까지는 7시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는 먼저 창고 문을 열었다. 못 쓰는 자전거가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전거 바퀴살이었다. 그는 바퀴살을 잘라 스프링을 만들면서 발전소 직원들에게 “탄성을 지닌 평평한 물건을 모두 가져오라”고 주문했다. 고온의 스팀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최악의 상황에서 스프링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발전기가 가동된 시간은 오후 8시 53분, 데드라인을 7분 남겨둔 때였다. 발전소 직원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발전소장은 그의 손을 잡고 “용범 리, 당신이 마닐라 시내 정전 사태를 막아줬다.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2008년 7월의 일이었다.

8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GE코리아 본사에서 만난 이용범 상무(53)는 당시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엔지니어에게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단지 모든 일에 어려움이 따를 뿐이죠.”

이 상무는 동양인 최초로 2011년 GE의 ‘명예의 전당’ 격인 ‘GE 아카데미 멤버십’ 회원이 됐다. 130년 역사의 GE는 1940년대부터 매년 ‘기술 마스터’ 한 명에게 회원 자격을 주고 있다. 현재 GE의 발전기 부문에서는 현업 엔지니어 중 5명만 가입돼 있다. 나머지 4명은 미국인이다.

1987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에 입사한 이 상무는 1999년 GE로 스카우트됐다. 미국 뉴욕 주의 엔지니어링센터에서 일하다가 2001년 GE코리아로 옮긴 뒤에도 그의 무대는 주로 글로벌 시장이었다. 1년에 300여 일을 해외에서 보냈다.

GE는 세계 1위 가스터빈 제조업체로 세계 발전기 가스터빈 중 절반이 이 회사 제품이다. 필리핀, 러시아, 심지어 알래스카에서도 문제가 생기면 “용범 리! 용범 리!”를 애타게 찾는다.

이 상무는 “엔지니어라면 항상 3가지 솔루션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3가지는 ‘긴급 처방’ ‘단기 해결책’ ‘중장기 해결책’이다. 그는 “현장에서 겪는 문제 상황은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에 한 가지 원칙만 고집할 순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초 대만의 한 발전소를 완전히 해체해 재정비하는 45일짜리 프로젝트를 맡았다. 3월에는 2011년 대지진 이후 가동을 멈춘 일본 니가타(新潟) 현의 가시와자키 원자력 발전소의 설비를 보호하기 위한 ‘런 백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 상무는 자신이 성장할 수 있었던 모든 공을 ‘위기’로 돌렸다.

“위기는 저를 더욱 강하게 만듭니다. 다양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저는 성장했습니다. 그러니 위기는 두려워 할 대상이 아니라 반가운 친구인 것이죠. 하하하.”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이용범 상무#마닐라#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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