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이진]은행, 살려면 해외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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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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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경제부 차장
이진 경제부 차장
‘Adapt or die(적응하라. 안 그러면 죽는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머니볼’에서 배우 브래드 피트가 맡은 주인공 빌리 빈의 대사(臺詞) 한 토막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단장인 빈은 구단이 가난해 이름값이 비싼 스타들을 영입할 수 없자 대신 출루율은 높지만 한물간 선수들을 받아들이는 승부수를 택한다. 오랜 경험을 내세운 백전노장 스카우트 한 명이 “메이저리그가 150년간 선수들을 뽑던 방식을 무시하는 거냐?”고 대들자 빈은 이 말을 던진다. 결국 애슬레틱스는 2002년에 메이저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20연승을 거두는 위업을 달성한다.

이 대사를 국내 은행에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국내 거대 은행들이 본격적으로 경쟁하는 원년이다. 하나금융지주가 마침내 외환은행을 품에 안아 거대 은행 대열에 합류하면서 경쟁의 신호탄을 쏘았다. 조만간 하나금융이 차기 회장을 선임하면 새 사령탑의 지휘 아래 ‘하나+외환은행’은 KB국민과 신한, 우리은행 등과의 치열한 각축전에 나설 것이다.

하지만 한국처럼 좁은 시장에서 벌이는 외형 싸움은 경쟁에 익숙한 은행들이라도 힘겨운 소모전이 될 것이다. 국내 은행은 공략 계층이나 상품 구성이 거의 같아 ‘제로섬’ 경쟁을 피하기 어렵다. 고객들에게도 반드시 유리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덩치 큰 은행들이 이심전심으로 서로 말과 행동을 맞춘다면 그 피해는 고객에게 돌아온다.

거대 은행들은 성장 동력을 해외에서 찾아야 한다. 해외로 눈을 돌리는 순간 국내 시장에서 벌어지는 과당경쟁의 우려는 사라진다. 세계 교역 10위권인 한국은 무역금융의 수요도 커지고 있어 여건이 좋다. 은행들이 해외로 나가면 외화를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어 금융위기에 대처하기도 쉬워진다.

하지만 현재 국내 은행들의 해외 진출 상황은 한심한 수준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초국적화지수(TNI)는 작년 6월 말 현재 3.0%에 불과하다. HSBC와 크레디아그리콜 같은 글로벌 은행은 64.7%, 37.4%에 이른다. TNI는 은행 해외 점포의 자산과 수익, 직원 수를 전체 자산과 수익, 직원 수로 나눈 수치로 해외 진출 정도를 알려준다. 지난해 12월 만난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도 “국내 은행이 국제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국민은행은 이익 창출을 위한 시스템을 복원하는 데 2∼3년이 더 걸릴 것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필자에게는 ‘국민은행이 익숙한 국내를 떠나 해외로 나가는 데 적어도 2∼3년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국내 은행은 소매금융을 주로 하던 산탄데르가 불과 20년 만에 스페인 5위 은행에서 37개 국가에 걸쳐 1만4000개 가까운 영업점을 보유한 글로벌 은행으로 성장한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핑계로 만만한 국내 영업에 치중하며 내실을 다진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지금은 국내 은행들이 이 말을 새겨야 할 시점이다.

‘Advance abroad or die(해외로 진출하라. 안 그러면 죽는다).’

이진 경제부 차장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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