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LCD문책에 기업들 충격, “정부지원도 없이 홀로 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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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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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은 국가차원 지원… 한국은 대기업 때리기”

삼성이 정기인사 관례를 깨고 액정표시장치(LCD) 실적 부진의 책임을 물어 담당 사장을 교체한 데 대해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충격을 받고 있다. 실적이 나쁘면 문책이 뒤따르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 인사는 단순히 개별 기업 차원의 인사로 보기 어렵다는 인식 때문이다.

수출 대기업 관계자는 “중국, 일본, 대만 정부는 한국 LCD산업을 따라잡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보호 장벽을 높이고 전폭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데 한국은 정부 지원은커녕 정치권의 ‘대기업 때리기’가 계속되고 있다. 반(反)기업 정서 속에서 고군분투해온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이 문책을 당했다는 점에서 위기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LCD는 반도체와 더불어 삼성전자의 부품 사업을 떠받치는 양대 축이라서 삼성그룹 차원에서는 부정기 인사를 통해서라도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어 돌파구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었다. 하지만 LCD 부진은 비단 삼성전자만이 겪는 현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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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호황을 누렸던 LCD는 공급 과잉과 유럽, 북미 시장의 판매 부진이 겹치면서 가격이 정체되는 바람에 대만, 일본의 상위권 기업들도 1년 넘게 적자의 늪에 빠져 있다.

대형 LCD 세계시장 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하는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는 그래도 잘 버텼다.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1∼3월), LG디스플레이는 지난해 4분기에 적자로 접어들었다. 이들 기업이 무능하거나 방만하게 경영해서 유독 우리만 부진을 겪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글로벌 악재 속에서도 나름대로 선전했다는 얘기다.

○ 삼성 인사에 충격 받은 수출 기업들


주요 수출 기업들이 삼성의 인사에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경쟁국들은 국가가 조직적으로 지원을 해도 허덕이는 판에 우리 기업들은 정부의 지원 없이 고군분투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를 피할 수 없었다는 점에 불안감과 허탈함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뛰는 대기업들은 ‘삼성 LCD의 위기’가 ‘한국 수출산업의 위기’가 될 수 있다며 절박함을 호소한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가 수출을 주도하는 기업과 업종에 대한 지원에 눈감고 있다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인 것이다. 특히 최근 정부와 정치권이 무리하게 가격 할인을 종용하고, 대기업-중소기업 동반성장 압박과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 등 전방위적으로 대기업을 몰아붙이는 기세가 계속되면 궁극적으로 한국 경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이 지난해 경영에 복귀할 때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이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업에도 적용되는 얘기다. 정치인들은 글로벌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여기서 밀리면 국가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위기의식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 LCD로 본 경쟁국의 기업지원 ‘전쟁’


비교적 산업 구조가 고착화된 미주, 유럽과 달리 동북아시아는 여전히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하는 경제 권역이다. 최대 내수(內需)시장을 가진 중국, ‘잃어버린 10년’을 만회하려고 기업 지원에 팔을 걷어붙인 일본, ‘차이완(차이나+타이완)’ 밀월을 통해 한국 기업을 밀어내고 있는 대만. 이 3국의 공통점은 정부가 주력 업종과 기업을 조직적으로 지원한다는 점이다.

LCD 시장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경쟁국들이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기업을 지원하는 현황을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나라를 정보기술(IT) 강국으로 만든 원동력인 LCD를 둘러싸고 일본, 중국, 대만은 한국을 잡기 위해 정부와 경제계가 뭉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일본과 중국 정부는 대형 TV용 LCD 패널은 이미 확고한 우위를 점한 한국 및 대만과 경쟁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휴대전화 등에 쓰이는 중소형 LCD 생산업체들을 집중 지원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규모의 경제’를 위해 정부 산하 산업혁신기구를 통해 도시바, 소니, 히타치의 합작법인 설립에 2000억 엔(약 2조6400억 원)을 지원하려 하고 있다.

대만 정부는 디스플레이와 반도체를 집중 육성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예산을 쓰는 한편 대만 기업과 일본 업체의 합병을 유도하고, 중국 기업들의 지분 투자까지 공식 허용했다. 지난해 북미를 제치고 최대 LCD 시장으로 등극한 중국은 외국산 LCD TV에 관세를 물림으로써 외국기업에게 관세를 회피하려면 아예 중국에 현지 법인을 설립하는 편이 낫다는 신호를 줘 LCD 생산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주변 경쟁국의 동향을 보면 LCD 산업이 기업주도 차원을 넘어서 국가주도형 체제로 바뀌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차·화·정’도 같은 위기 올 수 있다


산업계는 다른 수출 업종에도 ‘제2의 LCD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수출을 이끄는 이른바 ‘차·화·정’, 즉 자동차, 석유화학, 정유 업종에서도 LCD와 비슷한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현재 중국의 자동차 기술력은 우리나라를 100으로 했을 때 93으로 한참 뒤져 있지만, 전기차 부분만 따지면 105로 오히려 우리를 앞섰다. 중국 정부는 지난해 ‘에너지 절약 및 신에너지차 산업 발전계획’을 통해 2020년까지 전기차 보급 500만 대를 목표로 17조 원 정도를 투입한다고 밝혀 기술 격차는 더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정부가 ‘2015년까지 국내 브랜드 차량 비중을 50% 이상으로 높이겠다’는 계획을 세워 우리 자동차 업체의 수출은 더 위축될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 변화 속도가 느린 편인 정유, 석유화학 업종도 안심할 수 없다. 우리 정유업체의 수출 경쟁력은 현재로는 아시아권 최고다. 하지만 정유업체들은 정부가 지금처럼 시장 경제 질서를 무시한 가격 하락 압박 등을 가하면 장기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한 정유업체 관계자는 “정유업의 영업이익률은 2∼3% 수준에 불과하지만 정유업체들은 수출 선도 기업이라는 사명감으로 몇조 원이 드는 설비 투자를 이어간다. 정부가 ‘정유사가 폭리를 취한다’는 편견을 갖고 가격 인하를 강요하면 기술 개발이나 자원 확보의 여력이 없어서 글로벌 시장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산업계에서는 정부가 기업의 경영 지원을 거시적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신성장동력 등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는 데 너무 치중하다 보니 ‘이미 우위를 점한 산업’을 홀대한다는 지적이다. 지식경제부는 신성장동력 10대 과제로 신약, 소프트웨어, 신에너지 등 특정 분야를 정해 예산 지원을 집중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 수출 5대 품목인 반도체, 선박, 자동차, LCD, 석유제품에 대한 지원은 거의 없다. 이들 품목은 당장은 유행이 지난 상품처럼 보이지만 수십 년간 우리 경제를 이끌어갈 원동력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유덕영 기자 fir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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