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대받던 구식 가전 ‘부활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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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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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기구를 보고 옷이 잘 꼬이지 않는 ‘워블세탁기’를 개발한 표상연 삼성전자 수석연구원. 손에 든 세탁판이 놀이기구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특허’ 제품이다.
놀이기구를 보고 옷이 잘 꼬이지 않는 ‘워블세탁기’를 개발한 표상연 삼성전자 수석연구원. 손에 든 세탁판이 놀이기구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특허’ 제품이다.
“빙빙 돌면서 위아래로 튕겨준다면?”

2008년 9월 표상연 삼성전자 수석연구원은 답답한 마음에 놀이공원을 찾았다. 옷이 꼬이지 않는 전자동 세탁기를 만들겠다고 큰소리친 뒤 2월에 팀을 조직했지만 신통한 아이디어가 없었다. 마라톤 회의에 지친 그와 팀원들은 바람이나 쐬자며 무작정 나왔다.

그런데 빙글빙글 돌아가는 놀이기구가 전자동 세탁기 바닥의 동그란 세탁판으로, 그 안의 사람들은 세탁기 빨랫감으로 보였다. 문득 인천 월미도의 인기 놀이기구 ‘디스코 팡팡’이 머릿속을 스쳤다. 디스크자키가 입담을 뽐내며 놀이기구를 상하 좌우로 흔드는 놀이기구다. 앉은 사람은 넘어뜨리고, 붙어 있는 사람은 서로 떨어지게도 한다.

“그래, 디스코 팡팡처럼 하면 옷감이 서로 엮이다가도 떨어지겠지? 유레카!” 표 수석과 팀원들은 끈질기게 매달렸다. 결국 올해 3월 ‘디스코 팡팡’의 원리를 빌린 전자동 세탁기 ‘워블’이 시장에 나올 수 있었다.

일명 ‘통돌이’로 알려진 전자동 세탁기는 10여 년 전 드럼 세탁기에 완전히 밀려난 ‘구식’ 가전이다. 하지만 개발자들은 ‘비주류에도 혁신은 있다’는 믿음으로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표 수석은 “100% 상품이 된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22년 동안 세탁기만 연구하면서 고치고 싶던 단점을 꼭 해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 ‘구식’ 가전의 부활로 빛 보는 혁신

마침 불행인지 다행인지 2008년 말 글로벌 경기침체가 왔다. 미국 같은 선진시장 소비자들도 신중하게 지갑을 열었다. 에너지 효율이 좋고, 실속 있는 상품을 찾았다. 마케팅에 좌우되던 한국 소비자들도 실속형 제품으로 눈을 돌렸다.

전자동 세탁기는 비슷한 용량의 드럼 세탁기 가격대의 60∼70% 수준인 데다 물의 온도를 높여주는 히터가 없어 전기료를 아낄 수 있다. 드럼 세탁기를 쓰다 전자동으로 돌아온 소비자도 적지 않았다. 그 결과 삼성전자의 2009년 전자동 세탁기 매출액은 전년보다 27% 늘어나 10년래에 최고점을 찍었다.

표 수석은 “수량으로 따졌을 때 드럼 대(對) 전자동의 비율이 7 대 3까지 간 적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거의 반반”이라고 말했다. 최구연 생활가전사업부 상무는 “요즘 미국에서는 에너지 효율도 좋고, 같은 용량에 가격대는 낮은 전자동 세탁기 성장률이 더 좋다”고 설명했다.

시장이 갑자기 변하니 표 수석과 팀원들이 3년 동안 매달린 혁신기술인 ‘워블 세탁판’이 쓰일 곳이 많아졌다. 수천만 원어치 옷을 사 빨래해가며 8개의 특허를 출원한 기술이다. 삼성은 이달 미국시장에 처음으로 전자동 세탁기를 내놓았고, 표 수석의 워블 세탁기도 세계시장에 곧 선보일 예정이다.

○ 냉장고도 ‘비주류’가 뜬다

분리형 냉장고 ‘컬렉션 시리즈’를 개발해낸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 주역들이 모였다.
왼쪽부터 양옥모 과장, 최동순 차장, 박상현 대리. 삼성전자 제공
분리형 냉장고 ‘컬렉션 시리즈’를 개발해낸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 주역들이 모였다. 왼쪽부터 양옥모 과장, 최동순 차장, 박상현 대리. 삼성전자 제공
“냉장고가 안방에 있네?” 냉장고에도 ‘비주류’ 분야를 개척한 사람이 있다. 요즘 대세는 두 손으로 문을 여는 양문형 냉장고. 하지만 최동순 삼성전자 생활가전사업부 냉기마케팅그룹 차장은 냉동고와 냉장고, 김치냉장고 등 문이 하나만 달린 기능별 냉장고를 생각해 냈다. 디자인과 크기가 똑같은 세 개의 냉장고를 하나씩 사 합체해도 되고, 분리해도 되는 아이디어다.

그의 취미이자 일인 ‘가정 방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최 차장은 “대용량 경쟁이 심해지면서 부엌이 작은 신혼집들은 덩치가 큰 양문형 냉장고를 어디에 둬야 할지 고민하더라”며 “안방이나 심지어 다용도실을 쓰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매년 50여 가구를 찾아 냉장고의 위치와 쓰임새를 살핀다. 친구 집에 놀러 가도 냉장고 사진을 찍어온다. 최 차장은 “젊은 주부는 냉장고가 커서 문제, 중년 주부는 작아서 문제였다”며 “그래서 실속 있게 필요에 따라 추가로 사거나 세컨드 냉장고로 활용할 수 있는 ‘컬렉션 시리즈’를 올 초에 내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컬렉션시리즈’는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예상보다 2배 높은 매출을 올렸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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