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못해 콤플렉스…공부할셈 치고 동영상에 자막 붙이다 “그래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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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3일 19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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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키의 직원 약 30명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다. 미국과 중국, 일본, 중동 지역에는 콘텐츠 제휴를 맡는 직원들이 1, 2명씩 근무하고 한국 사무실은 경영지원과 마케팅 업무만 담당한다. 대부분의 직원은 싱가포르에 있다. 사진은 제품 개발회의를 하는 싱가포르 본사. 뒷줄 왼쪽부터 창업자 문지원 대표와 호창성 대표. 비키 제공
비키의 직원 약 30명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다. 미국과 중국, 일본, 중동 지역에는 콘텐츠 제휴를 맡는 직원들이 1, 2명씩 근무하고 한국 사무실은 경영지원과 마케팅 업무만 담당한다. 대부분의 직원은 싱가포르에 있다. 사진은 제품 개발회의를 하는 싱가포르 본사. 뒷줄 왼쪽부터 창업자 문지원 대표와 호창성 대표. 비키 제공
2006년 그들은 학생 부부였다. 아내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교육공학 석사과정을 밟았고 남편은 스탠포드대에서 경영학석사과정(MBA)을 들었다. 각각 미국 동부와 서부의 명문대학 유학생이었다. 겉보기엔 그럴싸해 보였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대학 때부터 커플이던 이들은 남자가 졸업할 무렵이던 2000년에 함께 3차원(3D) 영상메신저 회사를 차렸다. 실패했다. 양가 부모님께 수천만 원씩 빌렸지만 한 푼도 못 돌려드렸다. 할 말이 없었다.

남자는 대기업에 취직했다. 여자는 졸업을 준비했다. 이들에게 낭만은 사치였다. 로맨틱한 프로포즈는커녕 쫓기듯 결혼해 미국 유학을 준비했다. 그대로 회사원이 되긴 싫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업체 비키를 창업한 문지원 호창성 부부의 얘기다.

●영어가 어려웠다

"우리는 기업가에요. 놀 때도 항상 사업 아이템을 찾아요." 두 달 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정보기술(IT) 전문지 테크크런치가 주는 '크런치어워드'라는 상을 받고 싱가포르 본사로 돌아가던 이 부부를 만났다. 그 때 비키를 어떻게 만들었느냐고 묻자 영어를 너무 못해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던 문 대표가 말했다. "영어공부 할 셈 치고 불법 동영상에 자막을 달다 '이걸 좀 쉽게 하는 법이 없을까?' 고민했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호 대표도 "우리 둘 다 영어공부에 별 방법을 다 써봤던 터여서 바로 사업이 되겠구나 싶었다"고 했다.

이들은 사용자가 직접 백과사전 내용을 만드는 위키피디아처럼 비키를 만들었다. 누리꾼 여럿이 드라마를 나눠 번역해 자막도 빨리 만들 수 있고 오류도 고치게 한 것이다. 위키피디아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못잖은 정확성을 갖게 된 원리를 이용했다. 또 자막 작업에서 가장 귀찮은 일이던 입 모양과 자막을 일치시키는 것을 쉽게 하도록 도구도 개발했다. 외국어 실력이 있는 누리꾼이라면 비키를 이용해 번역하는 게 어렵지 않게 됐다.

●얄궂은 운명

2006년 겨울 문 대표가 기숙사에서 떠올린 아이디어는 순풍에 돛단 듯 잘 진행됐다. 2007년 여름 문 대표가 먼저 대학원을 졸업하고 남편이 있는 캘리포니아로 이사했다. 7개월 동안 비키의 초기 모델을 완성했다. 호 대표는 이를 스탠포드대의 창업 수업시간에 발표했다. 이 수업에는 실제로 실리콘 밸리에서 투자를 담당하는 벤처캐피탈리스트가 패널로 참석하기 때문에 '한번 검증받아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는 수업시간에 실제 서비스를 들고 온 '진지한 학생'으로 주목받았다. 발표를 마친 호 대표는 한 투자자로부터 25만 달러를 받게 된다. 비키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2008년 9월 서비스를 막 일반인에게 공개할 시점에 모든 게 헝클어졌다.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고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됐다. 8년 전 첫 창업의 악몽이 겹쳐졌다. 그 때도 이른바 '닷컴버블'의 붕괴가 시작되던 시점이었다. 투자자들은 사업 초기에는 '사용자 100만 명만 넘으면 투자하겠다'고 했지만 150만 명, 200만 명의 사용자를 모아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초기 자금은 바닥을 드러냈다. 결국 개인 재산을 다시 사업에 쏟아 부었다.

●비키의 성공

2009년 말, 사용자는 200만 명을 넘어섰지만 이들은 괴로웠다. 매주 새 서버 컴퓨터를 사야 했기 때문이다. 가진 돈은 다 떨어졌다. 그 때 '꽃남 신드롬'을 낳으며 히트를 친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제작회사 그룹에이트가 비키에 관심을 보였다. 수익을 나누는 조건으로 2009년 정식 계약했다. 2010년에는 미국 경기도 바닥을 찍고 회복세를 탔다. 지난해 5월, 이들은 실리콘밸리 투자자들로부터 430만 달러의 투자를 추가로 받게 된다.

게다가 마침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퍼져나가던 시기였다. 새로 계약한 드라마 '꽃보다 남자'와 '장난스런 키스'는 비키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 첫 상영이 시작된 뒤 해당 드라마의 월 광고 매출은 각각 3만 달러(약 3300만 원)에 이르렀다. 비키는 자막을 붙인 드라마에 10분에 한 편 꼴로 광고를 삽입해 광고 수입을 올린다.

●세계는 다르다

비키에서 주로 상영되는 동영상은 미국이나 유럽의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다. 그동안 세계시장에 진출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던 한국이나 인도, 중남미 지역의 '비주류' 영상물이 메인 콘텐츠다. 누가 보겠느냐 싶지만 매월 400만 명이 이런 콘텐츠를 보려고 비키를 찾는다. 호 대표는 "세계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넓다"고 말했다.

이들은 "10여 년 전 한국에서 처음 창업했을 때 '한국식으로 하면 안 되겠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한국에서 작업할 땐 모든 걸 스스로 만들려다 실패했다. 그러나 비키를 만들 땐 핵심 기술을 빼고는 모조리 시장에 있는 기술을 사서 썼다.

투자는 미국에서 받았지만 물가가 싸고 영어가 잘 통하는 싱가포르에 사무실을 냈다. 창업자는 한국인이지만 최고경영자(CEO)로는 미국 방송국 NBC유니버셜 콘텐츠 제휴 담당 수석부사장 출신인 라즈믹 호박히미언 씨를 영입했다. 콘텐츠 제휴가 비키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직원도 다양하다. 한국인과 미국인, 싱가포르인은 물론 헝가리,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스페인 출신의 직원이 함께 일한다.

문 대표는 "과거 우리를 포함한 한국 기업들은 '반에서 1등하고, 전교 1등하고, 전국 1등하겠다'는 식으로 세계시장을 노렸던 것 같다"며 "이젠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들의 창업 과정에 '국적'이란 단어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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