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갚으면 바보되는 사회?… 파산, 10명 신청하면 9명꼴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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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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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도산법 시행후 개인파산 신청 53만명 밀물… 도덕적 해이 도마에

#사례 1

“빚이 3억 원을 넘다 보니 갚을 엄두가 나야 말이죠. 빚 독촉도 너무 심했고….”

김모 씨(44)는 2003년 친척과 함께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나면서 채무불이행자(신용불량자)가 됐다. 몇 차례 고민한 끝에 ‘채무를 해결해 드립니다’라고 광고하는 법무사사무소를 찾기도 했다. 그는 빚 독촉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법원에 개인파산을 신청했으며 최근 면책 결정을 받았다. 법원이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고 보고 탕감해준 것이다. 이제 은행연합회 전산망에서 김 씨를 조회하면 ‘1201’이라는 코드가 따라다닌다. ‘파산으로 인한 면책 결정’, 즉 개인파산자라는 꼬리표다. 김 씨는 제도권 금융회사와 거래를 전혀 할 수 없다. 그는 장모와 친지의 이름을 빌려 통장과 신용카드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교회 전도사여서 금융거래가 많진 않지만 다른 사람 명의의 계좌를 사용하는 데에서 오는 불편함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요즘 들어 부쩍 “개인파산이 옳은 결정이었을까”라며 후회를 한다.

#사례 2

지난해 전남지역의 일부 농어촌 마을에서는 개인파산이나 개인회생 신청자가 급증해 농협중앙회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특히 완도군의 한 농협에서는 조합원 46명 가운데 대부분인 43명이 개인회생을 신청하기도 했다. 개인회생은 개인파산까지는 아니지만 법원이 강제로 채무를 조정해 일정 기간 일정 금액만 갚고 나머지는 면제해 주는 것이어서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가 개입될 수 있는 제도로 꼽힌다.

표면적 이유는 이상기온 여파로 김, 미역 등 수산물 생산이 어려워진 데다 유가까지 올라 생활형편이 악화돼 빚을 온전히 갚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마을을 찾은 법무사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농어촌 지역에서는 ‘빚으로부터 해방’ 등의 문구가 적힌 법무사사무소의 현수막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농협 관계자는 “당시 ‘개인회생을 신청하지 않으면 바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며 “규모가 영세한 단위농협의 경우 개인회생이 늘면 곧바로 경영 부실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채무자 구제제도인 개인파산과 개인회생을 악용하는 사례가 늘면서 신용질서가 붕괴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개인파산 및 개인회생을 오남용할 때 직접적 타격을 보는 금융권 관계자들은 “허술한 구제제도에 사익에 눈이 먼 일부 법조계의 상술까지 더해져 ‘빚을 갚는 건 바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대법원도 지난달 중순 이 제도의 문제점을 인식해 보완책을 내놓았지만 근본적 대안이 될 수 없다며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 통합도산법의 빛과 그늘

법원의 판단에 따라 이뤄지는 공적 채무자 구제제도인 개인파산과 개인회생은 2006년 4월부터 시행된 통합도산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빚을 상환하도록 요구하는 것보다는 면제해 주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통합도산법의 도입 취지는 좋았다. 채무자들이 과도한 채권 추심의 고통에서 벗어나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운영 결과는 도입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

전국 법원에서 접수한 개인파산 신청 건수는 2006년 4월부터 올해 6월까지 53만4628건이다. 이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 2006년 3월까지 신청 건수 7만5816명의 7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특히 올해 하반기부터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에 따라 시중 대출금리가 시차를 두고 오를 것으로 예상돼 파산 신청자가 다시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주요국과 비교한 인구 1000명당 개인파산 및 개인회생 제도 이용 비율도 한국이 3.1명으로 미국(5.0명)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면서 최고 수준에 도달한 상태다. 개인회생제도는 개인파산에 비해 일정 정도 빚을 상환하기는 하지만 빚 감면 규모가 커 빚을 갚을 능력이 있으면서도 악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반면 원금 위주로 상환하도록 설계된 개인워크아웃 이용자는 통합도산법 도입 이후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개인워크아웃 신청자는 2005년 19만3698명에서 2006년 이후에는 연간 6만∼9만 명 수준으로 급감했다. 빚을 갚기보다는 안 갚는 쪽을 선택하는 개인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다.

○ 파산을 권유하는 사회

전문가들은 원인을 통합도산법이 허술하게 운영되는 데에서 찾고 있다. 판사 인력은 부족한데 파산 신청이 쏟아지면서 서면 위주의 검토가 이뤄지는 점을 꼽고 있다. 채무상황을 제대로 적시하지 않거나 재산 현황을 표기하지 않아도 인정상 받아들이는 사례도 적잖다고 금융권 관계자들은 불평한다. 실제로 지난해 법원의 파산 인용률은 90%를 넘겼다. 신청자 10명 가운데 9명 이상이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셈이다.

파산을 꼬드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일부 파산 전문 변호사와 법무사, 이들을 위해 일하는 브로커들이다. 이들은 지하철 버스 생활정보지 등에 ‘파산 보장합니다. (수임료) 할부 납부 가능’ 등의 광고로 채무자를 파산의 길로 유혹하고 있다. 신용회복위원회(신복위)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서울시내 주요 150개 버스 노선의 77.3%인 116개 노선에서 개인파산 및 개인회생 광고홍보물이 발견됐다. 한때 200만 원 안팎이던 개인파산 수임료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서울 기준으로 변호사는 100만 원 선, 법무사는 40만∼50만 원 선으로 내려갔다.

고홍석 서울중앙지법 파산담당 판사는 “파산 신청을 알선하는 브로커들이 횡행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파산 신청자들의 신청서 내용이 비슷비슷하다”며 “심지어 신청자가 신청서의 내용을 정확히 모르는 사례도 있다”고 밝혔다.

브로커들이 개인파산의 불이익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점도 문제다. 법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개인파산 선고 후 향후 5년간 금융사 거래에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하는 신청자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상적인 경제생활이 사실상 불가능해 대부분 소득이 드러나지 않는 지하경제로 흘러들어 간다는 지적도 나온다.

홍성표 신용회복위원회 위원장은 “신용은 국격(國格)과도 직결되는 사안인데 최근 개인파산자 증가 추세를 보면 신용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과도한 빚에 허덕이는 채무자가 정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면제해 주는 것도 좋지만 면제에 따른 책무를 함께 부과해야 파산 오남용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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