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2모작]교직 은퇴후 농장주로 김성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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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6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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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과의 싸움 그 와중에도…일흔에 캐낸 ‘희망 연꽃’

교장으로 은퇴한 뒤 60대 후반에 농장 경영주로 변신한 김성구 씨(오른쪽)가 충북 청원군 내수읍 은곡2리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부인과 함께 재배통에 심은 연꽃을 돌보고 있다. 김 씨는 “6월 중순이 지나면 연꽃이 활짝 피어 농장 전체가 환해진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김성구 씨
교장으로 은퇴한 뒤 60대 후반에 농장 경영주로 변신한 김성구 씨(오른쪽)가 충북 청원군 내수읍 은곡2리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부인과 함께 재배통에 심은 연꽃을 돌보고 있다. 김 씨는 “6월 중순이 지나면 연꽃이 활짝 피어 농장 전체가 환해진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김성구 씨
《정년퇴직 후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사례를 주변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우연하게 찾아온 계기를 인생 후반기의 생업으로 탈바꿈시킨 이야기도 드물게 찾아볼 수 있긴 하다. 뜻밖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높이를 낮추고 겸허한 자세로 생활해야 한다. 무엇보다 몸을 움직여 무슨 일이든 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충북 청원군에서 연꽃농장을 운영하는 김성구 씨(72)는 교장까지 지낸 경력을 내세우지 않고 흙과 함께 후반기 인생을 살고 있다.》
“흙과 함께 인생 후반전 비닐하우스만 있어도 갈 곳과 일할 곳 생겨”

○ 생각지도 않은 연꽃과의 만남

충북 청원군 내수읍 은곡2리에서 ‘연꽃과 다육이 아름다운 집’을 경영하는 김 씨는 ‘교장선생님’ 출신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마친 뒤 고향인 내수읍으로 내려와 1964년 교사 생활을 시작했고 1994년부터는 교장으로 일하다 5년 뒤 정년퇴직했다. 그는 “교직에 있으면서 사진 촬영과 서예 등을 취미 삼아 했기 때문에 은퇴하면 사진 찍고 붓글씨 쓰면서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회 장로인 그가 2000년 충남 공주시에 있는 공주원로원을 위로 방문한 것이 전환점이 됐다. 은퇴한 기독교 교역자들이 지내는 요양원인 이곳 차기천 원장(목사)이 “김 장로님, 연꽃 한번 키워보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말을 꺼냈다.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연꽃과 함께 생활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한참을 지나 차 목사가 그에게 충북 청주시에서 연꽃 전시회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는 학교 후배인 청주동물원장으로부터 동물원에서 전시회를 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아냈다. 차 목사는 즉각 지름 1m의 연꽃 재배통 500개를 보내왔고 이때부터 그는 연꽃과의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다. 2003년 무렵의 일이었다.

김 씨의 부인 송경자 씨(65)는 “고구마도 심어본 적이 없었는데 연꽃을 키우려니 고생을 엄청나게 많이 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동물원 직원들이 도와준다고 재배통에 흙을 담고 그 위에 거름을 넣어주자 당연한 순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연잎이 녹는 모습을 보고서야 잘못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 씨 부부는 “거름으로 쓰려고 소똥을 처음 만져보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 일하겠다는 의지가 암도 물리쳐

차 원장은 연꽃 전시회가 성공하자 재배통 500개를 모두 가져가고, 대신 그에게 150만 원을 건네주며 연꽃 재배용 비닐하우스를 지으라고 조언했다. 이 무렵 김 씨는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문을 연 어린이집 원장으로도 일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젊은이 못지않게 일하던 그는 2004년 12월 두 차례 하혈을 했다. 병원 진찰 결과 직장암 3기 판정을 받았다. 암이 있는 부위를 잘라낸 뒤 배변주머니를 달고 남은 생을 살아야 한다는 통보였다. 그는 “교사시절 ‘삶의 질’을 강조했기 때문에 현실을 받아들이기 싫었다”며 “수술을 하지 않으면 얼마나 살 수 있냐고 의사에게 물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마침 아는 사람의 귀띔으로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국립암센터 박재갑 원장에게 다시 진료를 받았다. 중학교 후배이기도 한 박 원장은 “환부를 줄인 뒤 수술을 합시다”라고 말했다. 항암치료에 6주, 절제수술 이후 6개월, 복원수술 이후 6개월의 기약 없는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투병 중에도 어린이집 일과 연꽃 재배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는 “오전 4시에 일어나 연꽃을 돌본 뒤 어린이집에서 일했고 다시 밤늦게까지 연꽃을 관리했다”며 “청주에서 일산의 암센터까지 3시간 거리를 2번 빼고는 모두 직접 차를 몰고 가 치료를 받았다”고 말했다. 김 씨가 암을 이기자 같은 병실에 있었던 환자 5명은 “김 선생님에게 기적이 일어났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는 올해 3월 현재의 자리에 땅을 빌려 농장을 옮겼다. 600평 크기의 농장은 청주∼충주 국도 바로 옆에 있어 찾는 손님이 많다. 그동안 단골도 생겨 부부의 생활비는 거뜬하게 충당할 정도로 수입을 올린다. 그는 “100평짜리 비닐하우스만 있어도 누구라도 갈 곳과 일할 곳이 생긴다”며 “교장을 지낸 뒤 농장 사장을 할 줄은 몰랐지만 80세까지는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청원=이진 기자 leej@donga.com
■ 강창희 소장의 한마디

김성구 씨는 정년퇴직 후 시작한 일을 수입이 따르는 사업으로 성공시킨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연꽃 재배 비즈니스’라고 해도 손색없을 만한 단계로까지 발전했기 때문이다. 다만 김 씨는 노후준비에서 연금의 중요성을 너무 가볍게 본 점을 반성하고 있다. 퇴직 당시에는 은행금리가 10%대로 높아서 목돈을 예금하고 이자만 받아도 매달 연금수령액 못지않았다. 여기에 자녀의 독립을 돕기 위해 어느 정도의 목돈이 필요할 것 같아 연금을 일시금으로 받았다. 그러나 그 후 급격한 금리하락으로 노후설계에 큰 차질이 생겼다. 이 때문에 그는 후배들에게는 ‘연금이 효자’라는 생각을 갖도록 당부하고 있다.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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