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증권의 두뇌’ 증권CEO로 가는 ‘마패’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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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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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 5% 항상 교육중… 해외근무땐 4년 이상… 학연 지연은 잊어라
■ ‘인재 사관학교’ 사람들, 그들은 누구인가

최근 증권가에서는 두 가지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우선 ‘작지만 강한 회사’로 업계에서 뚜렷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 토러스투자증권의 사례. 이 증권사 리서치센터의 애널리스트 두 명이 얼마 전 한 경제지가 선정한 ‘베스트 애널리스트’에 뽑혔다. 리서치 지원인력을 포함해 총 21명 가운데 2명이 선택됐으니 10%에 가까운 비율이다. 큰 증권사 리서치센터가 80∼100명의 인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아주 잘하는 곳을 빼고는 한두 명 정도가 베스트 애널리스트로 꼽히는 게 현실이다. 게다가 이 증권사는 창립 두 번째 해인 2009 회계연도에 70억 원가량의 순이익까지 올릴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한국거래소 이사장 최종 후보 3명 중 한 명으로 박종수 전 우리투자증권 사장이 오른 일이 거론되고 있다. 최종 후보 세 사람 모두 증권사 사장 경력이 있지만 박 전 사장만 정치권과의 연줄이 부각되지 않아 눈길을 끌었다.

두 소식을 접한 증권맨들은 한결같이 “대우 출신이니까”라는 반응을 보였다. 토러스투자증권을 세운 손복조 사장이나 박종수 전 사장 모두 대우증권 사장을 거쳤다.

대우증권은 ‘인재 사관학교’라는 명성에 걸맞게 2000년대 들어 여러 증권사의 최고경영자(CEO)는 물론 리서치센터장 등을 대거 배출했다. 스타로 뜨기도 쉽고 금세 사라지기도 다반사인 증권업계에서 대우증권 출신들이 유독 각광받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다른 증권사에서 연봉을 두 배 주고도 데려다 쓰고 싶을 만큼 잘 훈련된 인재가 많기 때문이다. 또 이들은 대우증권을 떠난 이후에도 ‘동창회’를 꾸준히 열 정도로 끈끈한 동지애도 과시한다.

○ 어디로 어떻게 핵분열 됐나

대우증권 출신 CEO들은 지난해 말에 이어 이달에도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간단한 저녁식사만 하기도 하고 골프모임을 갖기도 한다. 업계의 실력자들이 모인 자리라 증권업계의 돌아가는 소식을 귀동냥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다.

대우증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증권업계 최다 CEO를 배출한 증권사다. 김해준 교보증권 사장, 김기범 메리츠증권 사장, 류근성 애플투자증권 사장, 나효승 유진투자증권 사장, 손복조 토러스투자증권 사장, 정유신 한국SC증권 사장,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증권사 이름 가나다순) 등이 현역 CEO로 활동하고 있다. 자산운용업계에서는 김호경 산은자산운용 사장, 최홍 ING자산운용 사장, 김석중 피닉스자산운용 사장 등이 있다. 황건호 금융투자협회 회장, 강창희 미래에셋퇴직연금연구소 소장 등 증권업계의 ‘터줏대감’들도 대우 출신이다.

짧게는 1년, 길게는 몇 년간 수행하는 리서치센터장 자리도 수많은 별들이 ‘명멸’하지만 유독 대우증권 출신들이 자주 기용된다. 윤세욱 메리츠증권, 조용준 신영증권, 임진균 IBK투자증권, 이종우 HMC투자증권, 김승현 토러스투자증권, 조익재 하이투자증권, 이재광 한국투자증권 센터장이 대우 출신이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대우증권의 계열사였던 대우경제연구소 출신도 있고, 대우증권에 2, 3년 머물렀다가 떠난 사람도 있다. 그래도 ‘대우’라는 결속력은 강하다. 대우증권이 2005년 9월 ‘홈커밍데이’를 열었을 때 참석자만 500명이 넘었다. 이들은 가끔 국제본부, 투자은행(IB)본부 등 분야별로 따로 동문회를 열기도 한다.

증권업계 대우맨들이 업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은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부터다. 국내 최초 민간경제연구소였던 대우경제연구소가 매각되면서 연구소에 소속돼 있던 리서치 인력 일부가 움직였다. 또 대우의 국제신인도 하락으로 국제금융에서 경험을 쌓았던 사람들이 대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어렵게 되자 다른 증권사로 옮겼다.



▼ 1999년 대우그룹 해체되며 타사 진출 활발해져 ▼

○ 왜 각광받나

‘대우 출신들이 각광받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한 사장은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그는 몇 년 전 한 중견 증권사의 CEO 자리를 제의받아 면접장에 갔다. 대우 출신이긴 하지만 몇 년째 다른 증권사에서 일했던 그는 면접위원들에게서 “대우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말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그는 대부분 직원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오전 7시 반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일했던 당시 상황을 전달했다. 그러자 면접위원들은 “역시 다르다”는 평가를 했다고 한다.

대우증권 직원들이 강한 이유는 특별한 인재관리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우그룹 시절 대우증권은 학연, 지연, 혈연을 배제하고 ‘뛰어난 사람을 뽑아 잘 훈련시키고 적재적소에 쓴다’는 원칙을 지켰다. 지금도 고졸 출신의 임원이 한 부서를 책임지는 사례가 있을 정도다. 업계 최초로 경기 과천시에 연수원을 만들었고 전체 인력의 5%는 항상 교육을 받고 있을 때가 많았다.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현업과 병행해 1년 내내 교육을 받게 했다. 요즘도 대우증권 애널리스트들은 연수원이 따로 없는 증권사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지점 직원 교육장소에 가서 강사로 활약한다. 손복조 사장은 “다른 회사에서도 사장을 해봤지만 대우만큼 인재 배출 시스템이 잘 짜여진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 배경에는 무려 16년간 대우증권의 CEO로 재직한 김창희 전 사장의 역할이 컸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경기고, 연세대 동문인 그는 증권업계 최장수 CEO로 대우증권이 ‘명가’로 커나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자신이 뽑은 신입사원이 임원이 될 때까지 함께 일한 경우도 많아 직원들의 장단점을 잘 알았고 직원에게 능력에 맞지 않는 자리를 주는 일이 없었다. 직원들은 “열심히 일만 하면 임원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러다 보니 아침 일찍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 노하우 극대화

이런 기반이 있었기에 대우증권 직원들은 ‘1등의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대우증권 출신들은 1980년대 일본 미국 영국 헝가리 등에서 국제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많다. 손복조 사장, 강창희 소장은 일본 도쿄(東京)사무소장으로 오래 근무했다. 유상호 사장은 영국 런던에서, 김기범 사장은 헝가리 대우은행과 헝가리 대우증권 법인에서 실력을 닦았다. 박종수 전 사장도 헝가리 대우은행장 출신이며 황건호 회장은 1984년 미국 뉴욕사무소장으로 일하면서 700억 원대의 코리아펀드를 조성해 증권업계 국제화 1세대로 이름을 날렸다. 유 사장은 “대우증권이 CEO 사관학교가 된 것은 매우 긴 안목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를 키웠기 때문”이라며 “다른 증권사는 해외영업 실적이 안 좋으면 1, 2년 만에 불러들이기도 했지만 대우증권은 최소 4년을 보장했다”고 말했다.

물론 대우증권이 업계에서 가장 큰 조직이다 보니 인재가 많이 몰렸다는 측면도 있다. 대우증권은 ‘최고’, ‘최초’ 수식어를 얻은 기록이 많다. 대우경제연구소, 코리아펀드 말고도 국내 최초 해외사무소를 열었고 국내 증시 사상 최초로 연 주식약정 1조 원을 돌파했다. 2000년 산업은행이 주인이 되면서 업계 4, 5위권으로 한때 내려앉았다가 2004년부터 다시 브로커리지 분야 1위로 복귀했다.

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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