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기자의 쫄깃한 IT] “100% 완성때까지 기다린다”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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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텐도의 무서운 느긋함

‘정숙(靜肅).’

20년 전만 해도 각 회사 건물 내부에는 이런 푯말이 보였죠. 사훈도 아닌 이 단어가 인기 표어로 각광받은 데에는 당시의 분위기가 담겨 있습니다. 경제개발 시대에는 떠들지 말고 묵묵히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가장 큰 미덕처럼 여겨졌으니까요. 요즘으로 치면 포털 인기검색어쯤 된다고 할까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21세기 디지털 시대가 되고, 엄숙보다 ‘개성’이 강조되는 분위기입니다.

기억에서 사라진 이 단어가 이달 초 일본 교토에 위치한 닌텐도(任天堂) 본사를 방문(▶본보 17일자 A1·3면 “게임하나 개발에 20년… 아이디어 꽃피우는데는 기다림 필요”)하면서 다시 생각났습니다. 닌텐도는 한 해 24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적인 게임 회사입니다.

기자는 닌텐도를 방문하면서 다른 게임회사처럼 자유분방한 분위기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닌텐도의 대표적인 캐릭터인 귀여운 배관공 아저씨 ‘슈퍼마리오’나 ‘동키콩’을 연상하며 아주 아기자기할 거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모습이 기자를 맞았습니다. 흰 건물, 미끄러운 대리석 바닥, 조용히 속삭이며 회의하는 직원들…. 단독 인터뷰를 하기 위해 짙은 감색 정장 차림으로 나타난 이와타 사토루(巖田聰) 사장도 조끼 단추 4개를 모두 채운 정숙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정숙함을 반영하듯 닌텐도는 소프트웨어 하나를 공개하더라도 매우 신중한 편입니다. 외부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이른바 ‘서드 파티’와 관계도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받았죠. 그래서 닌텐도에 대해선 ‘폐쇄적이다’ ‘더디다’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와타 사장은 그럼에도 “닌텐도는 공격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와타 사장은 2000년 닌텐도에 스카우트되기 전에 협력업체인 게임개발사 ‘할(Hal)’에서 지금도 닌텐도 인기 게임으로 평가 받는 ‘별의 커비’ 시리즈 게임을 만들던 개발자였죠. 그가 닌텐도 사장으로 취임한 것이 불과 43세였습니다. 취임 당시 회사에는 40, 50대 선배들도 많았습니다. ‘슈퍼마리오’를 만들어 닌텐도의 게임 개발 아이콘이라 불렸던 게임 디자이너 미야모토 시게루(宮本茂)도 자신보다 일곱 살 더 많았습니다. 협력업체 출신의 비교적 젊은 개발자가 사장이 됐으니 부담이 없진 않았겠죠. 빨리 실적을 내고 싶었을 겁니다.

이와타 사장은 오히려 닌텐도 개발자들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며 “100%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격려했답니다. 예컨대 ‘Wii’ 게임기 속 메뉴 중 하나인 아바타 얼굴 만들기 ‘Mii’는 미야모토 전무가 20년 이상 걸려 만든 것이랍니다. 한두 해에 뭔가를 선보이기보다 “어떻게 하면 게임과 관심이 먼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까” 하는 지속적인 고민, 그것이 바로 이와타 사장이 말하는 ‘공격’의 의미였습니다.

문득 우리나라를 돌아봤습니다. 물론 120년 된 게임회사와 비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온라인 게임 강국’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의 경쟁력은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매년 대표작 하나씩은 만들어야 한다는 ‘패스트 게임’ 문화, 최근 유행하는 다중접속온라인게임(MMORPG) 하나는 내야 한다는 압박감, 게임 주 연령층인 10, 20대에 치우친 스토리…. 기자의 머릿속엔 닌텐도의 느긋함이 오버랩됐습니다.

슈퍼마리오가 나온 지 올해로 24년 됐습니다. 최근 닌텐도 Wii 용으로 나온 ‘슈퍼마리오 Wii’는 첫 주 93만 장이나 팔렸습니다. 이와타 사장은 “오랜 시간이 걸려도 모든 사람을 공감하게 하는 것이 더 공격적인 것 아닌가”라고 말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쥐죽은 듯 조용한 닌텐도 본사에서 갑자기 환청이 들리더군요. ‘스윽스윽∼’ 칼 가는 듯한 소리. 이런 게 ‘정숙한 공격’ 아닐까요?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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