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판매 문책’ 두려워 아예 연금저축 권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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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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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은행 20개 점포 펀드판매실태 ‘미스터리 쇼핑’ 해보니

투자설명서 1시간 넘게 ‘낭독’
규정 잘 지키지만 형식적 상담
투자성향 중립형 고객에게
“각서만 쓰면 고위험투자 가능”


지난달 말 서울 강남구에 있는 국민은행 지점. 창구 직원은 40쪽은 족히 돼 보이는 두툼한 펀드 투자설명서를 기자에게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읽어줬다. 1시간이 지나면서 기자가 “수수료나 위험요인 같은 핵심 내용만 추려 설명해 달라”고 했지만 직원은 “금융감독원 판매 지침에 따라 모두 설명해야 한다”며 ‘국어책 읽듯’ 끝까지 읽어 내려갔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10월 19일부터 11월 10일까지 국민, 우리, 신한, 하나 등 4대 시중은행의 서울시내 20개 점포를 찾아 일반 고객으로 가장해 펀드 판매 실태를 점검하는 ‘미스터리 쇼핑’을 한 결과 은행들이 규정 준수에 집착해 정작 필요한 상담을 소홀히 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판매 실태 점검은 금감원이 지난달부터 진행 중인 미스터리 쇼핑과 같은 방법으로 진행했다.

은행들이 당국의 미스터리 쇼핑에 대비하고 있어 외관상 불완전 판매는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든 모습이었다. 하지만 판매 지침에만 매달리다 보니 소비자가 원하는 상담을 해주지 못하고 형식만 갖추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동대문구 신한은행 지점에서는 기자가 가입을 요구한 상품들의 투자설명서를 출력하는 데만 몇십 분이 걸렸다. 직원은 “투자회사의 공시와 수익자 총회와 관련된 내용을 설명하려면 투자설명서를 봐야 한다”며 “고객에게 이런 기술적인 부분까지 알려주는 것은 사실상 불필요하지만 절차상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책상에 펀드판매 매뉴얼을 붙여놓고 일일이 대조해가며 상담해주는 직원도 많았다. 한 직원은 “형식적 절차에 맞추다 보면 펀드 하나 파는 데 반나절이 걸리기도 한다”고 털어놓았다.

지점마다 펀드판매 담당 직원이 한두 명에 불과해 담당자가 자리를 비우면 아예 펀드 가입을 할 수 없었다. 영등포구 우리은행 지점에서는 담당자가 식사를 하느라 자리를 비워 기업대출 담당 직원이 상담을 대신했다. 30여 분간 최근 수익률을 보여주며 상품을 추천하던 그는 “담당자가 와야 제대로 설명하고 가입도 할 수 있다”며 “오후나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 중구 신한은행 지점에서도 “담당자가 연수를 갔으니 내일 다시 오거나 인터넷으로 가입하라”고 말했다.

고객의 투자성향을 조사한 뒤 성향에 맞는 상품을 권해야 하지만 ‘각서만 쓰면 고위험 상품도 투자할 수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동대문구 우리은행 지점에서는 “고객님 성향이 위험중립형인데 이 등급으로는 해외펀드에 못 들지만 (본인 책임하에 가입한다는 내용의) 각서만 쓰면 가입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투자성향 진단 결과를 설명하거나 등급에 맞는 상품을 추천하진 않았다.

지침은 잘 지키지만 소비자가 원하는 내용을 잘 모르고 상담하는 사례도 있었다. 강남구의 국민은행과 우리은행 지점을 방문했을 때 투자성향 설문항목 가운데 파생상품에 투자한 경험을 묻는 질문에서 기자가 어떻게 답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냥 펀드 가입 기간을 써넣으면 된다”는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원래는 상장지수펀드(ETF)나 주가연계증권(ELS) 같은 파생결합상품에 가입한 적이 있을 때만 ‘투자 경험이 있다’고 답해야 한다.

금융당국이 9월 중순 펀드 부실 판매가 적발되면 해당 은행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고 경영진을 문책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은행들은 펀드 판매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펀드를 경쟁적으로 팔며 실적을 쌓으려 애썼던 것과 대조적이다. 중구 하나은행 지점에서 기자가 펀드 상담을 요구했지만 창구 직원은 다른 금융상품을 소개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 직원은 “요즘 펀드에 가입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며 “연말 소득공제를 앞두고 연금저축에 가입하는 게 좋다”고 추천했다.

이처럼 은행들이 펀드 마케팅 강도를 낮추면서 판매액도 크게 줄었다. 국민, 신한, 우리, 하나, 기업, 외환 등 6개 시중은행의 지난달 말 펀드 판매 잔액은 88조7760억 원으로 전달보다 2조8875억 원 줄었다.

정임수 기자 imsoo@donga.com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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