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내 그럴 줄 알았다”고 해야 하나

  • 입력 2009년 5월 20일 02시 58분


1990년 11월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이 진행되던 스위스 제네바의 관세무역일반협정(GATT) 본부 앞, 농민 이경해 씨가 할복자살을 기도했다. 이를 전후해 몇 차례 단식농성도 했다.

UR 당시 그가 주장한 것은 ‘쌀 시장 개방 불가’였다. 통상 전문용어로는 쌀의 ‘관세화 예외’를 인정하라는 것. 쌀 문제는 협상 타결의 최대 걸림돌이었다. 마침내 한국은 쌀 시장을 열었지만 관세화를 피하는 데는 성공했다. ‘최소시장접근(MMA)’ 형태였다.

쌀시장 관세화 토론회 결국 무산

이 씨는 2003년 9월 멕시코 칸쿤에서 결국 숨졌다. 당시 칸쿤에서는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리고 있었고 이 씨는 한국 농민단체 등 1만여 명의 각국 반(反) WTO 시위대와 함께 현지 경찰과 대치하다 칼로 왼쪽 가슴을 찌른 것이다. 사랑하는 딸의 결혼식을 2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그는 서울시립대 농학과를 졸업한 뒤 부모의 땅과 야산을 개간해 일군 고향(전남 장수군)의 농장에서 젖소 100여 마리를 키우던 농업경영인이었다. 농어민후계자협의회 결성을 주도했으며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장을 지냈다. 농민운동에 대한 열정과 농업후계자 양성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서 ‘세계의 농부상’을 받기도 했다.

한국은 UR에서 인정받은 ‘쌀 관세화 유예기간 10년’의 만료를 앞둔 2004년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에서도 관세화 유예 추가 인정을 끝까지 고집했고 관철해냈다. 전년에 있었던 이 씨 자결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만큼 우리에겐 절박한 문제였다.

관세화. 시장을 열되 수입가격을 국내가격 수준으로 끌어올릴 정도의 고율 관세를 매겨 개방 충격을 완화한다는 의미의 통상용어다. 개방 후엔 차츰 관세를 낮춰가야 한다. MMA란 관세화가 유예됐다 해도 국내시장 유통물량의 1∼5%는 저율 관세로 개방해야 한다는 뜻이다. 당시 한국이 MMA를 감수하면서도 관세화만은 끝내 거부했던 것은 관세화를 수용할 경우 수입물량과 함께 농민 피해가 워낙 커지기 때문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그동안 상황이 참 많이도 바뀌었다. 그 사이 국제 쌀값이 많이 올라 MMA 방식이 더는 한국에 유리하지 않게 됐다는 것. 농촌경제연구원은 지난해부터 “이제 관세화로 전환해야 쌀 수입이 줄어들고 관세 세수는 늘어난다. 관세화를 적극 검토할 때가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도 같은 생각이다. 관세화를 피하기 위해 그토록 피와 눈물을 흘렸는데…격세지감이란 이런 때 쓰는 말이다. 앞서 일본은 1999년에, 대만도 2003년에 우리와 비슷한 이유로 스스로 관세화를 택했다.

득실 안 따지고 반대만 해서야

함부로 결정할 일은 아니다. 대안을 정교하게 분석 비교한 후 정말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 또 쌀 문제에서는 ‘합리성 이외의 요인’이 작용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운동권 조직으로서의 성격이 짙은 일부 농민단체의 반응이 걱정이다. 광우병 시위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바로 작년에도 벌어지지 않았는가.

이상은 관세화 주장이 슬슬 공론화되던 두어 달 전 필자가 얼기설기 초고(草稿)만 써 놓았을 뿐 지면에는 싣지 않았던 칼럼의 골자다. 그러다 그저께(18일) 예정됐던 ‘쌀시장 조기 관세화 토론회’가 한 농민단체의 반대로 무산됐다. 전농 회원들이 단상을 점거한 것이다. 짓누르던 걱정이 현실이 되고 있는 것 같아 영 마음이 무겁다. 이제 뭐라고 해야 하나. “내 그럴 줄 알았다”며 무릎 칠 일은 아닌데….

그건 그렇고, 묻고 싶다. “관세화 쪽이 농민에게 더 유리할 것 같다”는데, 농민단체는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고민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가. 그저 반대만 하면 되는가.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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