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 반발 무마하고 대량해고 막기 ‘맞춤형 대책’

  • 입력 2009년 2월 9일 03시 14분


비정규직 ‘연령-직군별 분리대응’ 선회 배경

“근로자 처지따른 탄력운용이 현실적 해법” 평가 많아

4월께 입법화… 97만 비정규직-재계 수용여부가 변수

경기 취약 산업-고령층 근로조건은 더 악화될 가능성

비정규직 해법에 대한 접근 방식이 ‘고용기간 연장’에서 ‘연령 및 직군별 분리 대응’으로 선회한 것은 비정규직보호법 개정안을 둘러싼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그만큼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법 개정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한나라당 박준선 의원은 “비정규직 범주 안에 다양한 근로계약과 조건이 있는데도 단순히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만을 놓고 대응했기 때문에 노동계로부터 불만을 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당정은 이 문제를 의원입법을 통해 법제화하기로 방침을 정한 데다 현장실사도 당이 주도하고 있어 여당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법안 내용이 달라진다.

하지만 이 같은 방침에 해당 근로자들이 어느 정도 수긍할지 예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측의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는 예민한 문제다.

○ 연령·직군별 분리대응

당정은 당초 2월 국회에서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비정규직 고용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했다.

‘실업 증가→가처분 소득 감소→민간소비 위축→산업생산 감소→실업 증가’의 악순환을 막으려면 근로조건을 희생하더라도 일자리는 유지해야 한다는 게 당정의 견해였다.

하지만 노동계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불경기 상황에서의 비정규직 문제는 고용기간을 법으로 늘린다고 해서 해고를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 정부는 현행 비정규직법이 시행된 지 2년이 되는 7월이면 약 97만 명의 비정규직이 해고된다고 주장해 양측이 접점을 찾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과 정책 연대를 해 온 한국노총이 야권과의 공조를 추진하면서 당이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또 지도부의 불협화음까지 불거지면서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는 듯했다.

박희태 대표는 이달 초 ‘2월 비정규직법 개정안 처리 강행’을, 홍준표 원내대표는 ‘고용기간 한시적 연장’을 주장했다. 김성태 강성천 의원 등 노동계 출신 인사들도 법 개정에 강력히 반발했다.

이처럼 당 안팎의 반대에 부닥치자 지도부는 시간을 갖고 노동계의 협조를 구하기로 하고 2월 법안 처리 방침을 사실상 폐기했다. 이 과정에서 나온 대안이 연령, 직군별 분리 대응이다.

임태희 의장은 6일 주요당직자회의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일정한 기준에서 획일적으로 밀어붙일 사안이 아니다”라며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비정규직 제도를 보면 근로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비정규직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준선 의원은 “현장실사를 해보면 은행처럼 여유가 있는 곳의 비정규직은 고용기간 연장을 반대하지만 해고 가능성이 큰 중소기업 근로자들은 고용기간 연장을 희망하고 있었다”며 “외국처럼 우리도 근로조건에 따라 관련 규정을 차별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당정은 외국의 입법례를 참조하고 한국노총과의 추가 협의 및 현장실사를 통해 분리 대응과 관련한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한 뒤 이르면 4월 관련 규정을 입법화할 계획이다.

○ 각론에선 논란 여전

당정의 이 같은 방침은 일단 노동계의 반발을 누그러뜨릴 명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또 대량 해고를 막을 수 있는 현실적인 해법이라는 평가가 많은 편이다.

명지대 이종훈(경영학) 교수는 “근로자를 위해 최저임금제를 도입했지만 이 제도 때문에 신규 고용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업장이 있다”며 “비정규직 고용기간 만료로 피해가 크게 나타날 곳에 한해 이 제도를 융통성 있게 적용하는 것도 괜찮은 대안”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비정규직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는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없지 않다. 고용기간 연장은 대개 경기 취약 산업이나 고령층이 될 확률이 높은데 이 경우 해당 부문의 근로조건은 더욱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 등 해외에서는 임시직이 상시 근로자로 옮아가는 사례가 많지만 한국은 이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이 때문에 이번 조치로 이 같은 고용구조가 고착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어떤 업종을 차등 적용할지와 이에 따른 고용확대 효과에 대한 분석도 아직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고려대 김동원(경영학) 교수는 “사용자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고용기간 연장이나 연령·직군별 차등 적용 등을 선택하고 있는데 어떤 사용자와 근로자에게 어떤 규정을 도입할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성폭행 미수 사건으로 지도부 총사퇴를 선택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대응도 변수다. 지도부가 바뀌는 시점에 민감한 문제를 다뤄야 하기 때문에 자칫 강경파가 득세하는 빌미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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