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키운 죄? 중견기업들 이중고

  • 입력 2009년 1월 30일 03시 01분


“직원 299명 넘어서자 中企혜택-지원 한번에 사라져”

근로자 350명 육가공업체 A사

사료주기-분뇨처리 등 힘든 일에 외국인 60여명 고용

법대로 하면 40명밖에 못 써… 회사 3개로 편법 분할

연매출 2000억 차부품업체 B사

60일 이내 결제하던 대기업서 120일 어음으로 돌려

하도급 中企엔 60일 어음 지급… 한해 이자만 15억

《연간 870억여 원의 매출을 올리는 육가공업체 A사는 직원 1명이 3개 회사의 사무 회계 관리를 동시에 하고 있다. 본래 1개 회사지만 회사가 3개로 분사(分社)했기 때문이다. 관리 비용과 시간은 배 이상 늘어났고, 업무 중복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도대체 이 회사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편법을 부르는 경직된 제도=이 회사는 육가공 공장에 60여 명의 외국인을 고용하고 있다. 이들의 주 업무는 사료 주기, 분뇨 처리 등 이른바 ‘3D’ 분야다. 국내 인력으로는 인건비를 맞출 수 없는 데다 지원자도 없어 외국 인력으로 대체하고 있다.

문제는 현행 외국인 고용허가제가 제조업의 경우 상시 근로자 300명 미만 또는 자본금 80억 원 이하의 중소기업만 외국 인력을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중소기업 제조업 분야의 외국인 고용 허용 인원은 상시 근로자 101∼150명은 20명 이하, 201∼300명은 30명 이하, 301∼500명은 40명 이하다. 현행법대로라면 상시 근로자가 350명 안팎인 이 회사는 외국 인력을 40명만 써야 하지만 일손은 60명이 필요해 20명 정도가 모자라는 셈이다.

직원 350여 명의 회사가 20여 명의 내국인 인력을 한꺼번에 채용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 회사 측의 설명이다. ‘회사 쪼개기’는 이 때문에 생겼다. 3개 회사로 분사해 총 60여 명의 외국인을 고용한 것이다.

외국 인력 수급을 회사 규모로만 판별하지 않고 직종의 특성을 고려해서 했더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대기업에 자동차 부품을 납품하는 B사 대표는 요즘 회사를 키운 ‘죄’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고 호소했다.

현행 하도급법상 원사업자는 하도급 기업이 중소기업이면 60일 이내에 대금을 지급해야 한다. 하지만 중소기업이 아니면 이런 의무조항이 사라지며 통상 90∼120일의 어음을 주는 것이 보통이다.

B사는 2007년 중소기업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예전에는 두 달 안에 받던 납품 대금을 이제는 3, 4개월 후에 받고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에 재하청을 줄 때는 두 달 안에 대금을 줘야만 한다. 요즘 같은 경제위기에 2, 3개월의 운영자금을 보유하기도 쉽지 않지만 연매출 2000억 원에 영업이익 50억 원 정도의 회사가 돈을 빌리느라 지난해에는 15억 원의 이자를 부담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차라리 중소기업으로 남아 있었다면 이런 어려움은 겪지 않았을 것”이라며 “다른 자동차 부품회사의 경우 투자한 외국 회사가 회사를 분할할 계획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중견기업은 샌드위치=일반적으로 중견기업은 중소기업을 벗어난 상시 근로자 수 300명 이상∼1000명 미만의 회사를 지칭한다.

2007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국내 총 사업체 수는 318만9181개로 이 중 상시 근로자 300명 이상∼1000명 미만의 사업체는 모두 2275개. 1000명 이상은 407곳에 불과하다.

이들 중견기업이 중소기업 기준은 막 벗어났지만 대기업과 같이 각종 제도를 적용받기에는 자금 인력 기술 등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유영식 이사는 “법적으로 중소기업을 벗어나면 대기업으로 분류하지만 근로자 300명 이상∼1000명 미만, 연매출 1000억∼2000억 원대 미만 회사를 삼성 현대처럼 취급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유 이사는 “중소기업-중견기업-대기업으로의 유기적인 성장이 가능하도록 기반을 조성하고, 대기업 전환에 따른 비용을 최소화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에 대한 세제 혜택, 인력 지원, 자금 지원 등 각종 지원책이 대부분 중소기업 위주로 짜여 있다는 점도 중견기업들에는 애로점이다.

정부 부처의 각종 중소기업 지원책은 1500개가 넘을 정도로 많지만 중소기업을 벗어난 순간 이런 혜택도 거의 받을 수 없다.

국내 사업체 분포가 기형적인 ‘⊥자’형으로 중간층이 없는 데는 일정 규모 이상의 중소기업들이 중소기업을 벗어날 경우 불이익이 크기 때문이다.

강원대 경영학과 박상문 교수는 지난해 9월 ‘중견기업 경쟁력 강화방안 연구’에서 “현재처럼 중소기업과 대기업으로 양분된 제도 아래에서는 중소기업을 벗어나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이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며 “이 때문에 상당수 기업이 분사하거나 상시 근로자 수 조정으로 중소기업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중소기업보다는 조세 지원 범위를 축소하되 대기업으로 진입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될 때까지는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완충지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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