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 “담보-신용보증서 들고가도 대출 박대”

  • 입력 2008년 11월 10일 20시 53분


반도체 부품생산업체 자금부장 김모 씨는 요즘 밤잠을 설친다. 운전자금 10억 원을 마련할 길이 막막해서다.

김 씨는 "상반기까지만 해도 신용대출로 100억 원씩 빌려주던 은행이 지금은 담보를 잡아도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며 "정부 대책을 믿을 수 없어 자산 매각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10일 "일선 은행들이 과연 필요한 돈을 제 때 풀어주고 있는지 걱정"이라고 은행권을 강도 높게 압박하고 있지만 중소기업과 가계는 여전히 '돈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수익성과 건전성이 악화하고 있는 은행도 위험이 따르는 중기나 가계 대출을 쉽사리 늘리지 못하고 있다. 바짝 마른 돈줄을 두고 금융당국, 기업, 은행들이 '삼각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다.

●"돈 빌릴 데 어디 없나요"

시중은행들은 건전성 악화를 막기 위해 중소기업과 가계의 신규 대출을 자제하거나 만기 연장에 대한 심사기준을 강화하고 있다. 일부 은행은 각 지점에 내려 보낸 내년도 평가기준 지침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던 여신(대출)부분을 대폭 축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시중은행 영업점 직원은 "고객들이 추가 대출 받으러 오면 '대출이 너무 많습니다', '기존 대출을 갚아야 추가 대출이 가능합니다'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위험부담이 있는 고객을 털어내는 일종의 '디마케팅(De-marketing)'이다.

회사원 김모씨(36)는 "2년 전 받은 예금담보대출 만기가 다가오자 연장하려면 약정금리보다 2배를 더 내라는 전화를 최근 받았다"며 "금리를 한꺼번에 2배나 높이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은행권에서 외면받은 서민과 중기는 저축은행, 할부금융사와 신용카드사의 문을 두드리지만 제2금융권의 자금 사정도 여의치 않다. 대형대부업체조차 신규 대출 규모를 크게 줄이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불법 사채에 손을 댔다가 피해를 보는 서민도 늘고 있다. 금감원의 사금융피해상담센터에 접수한 상담건수는 8월 253건에서 10월 384건으로 늘었다.

●제 앞가림에 바쁜 은행들

한국은행에 따르면 10월 은행의 기업 대출은 전달보다 7조5000억 원이 늘어 9월(5조 원)보다 증가폭이 확대됐다. 늘어난 대출액 중 중소기업 몫은 2조6000억 원. 나머지는 대기업으로 갔다.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이 2007년 전달 대비 월 평균 5조4000억 원, 올해 1~6월 5조7000억 원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큰 폭으로 줄어든 것이다.

신용보증기금의 한 관계자는 "은행들이 대출 승인을 해주지 않아 신보의 보증조차 받을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며 "일선 은행들이 '신보 보증을 받아도 대출을 안해주겠다'고 얘기하는 상황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은행들도 제 앞가림에도 벅찬 상태다. 은행의 수익성과 건전성이 나빠져 중소기업이나 가계의 부실위험을 줄일 수밖에 없다. 신보 보증을 받더라도 보증률(80~85%)을 초과하는 리스크는 은행이 져야 한다. 정부가 신보의 보증률을 95%로 상향 조정하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자금담당 부장은 "일시적인 자금난에 빠진 우량 중소기업은 어떻게든 살려야하지만 옥석을 가리기 쉽지 않다"며 "신용위험이 높은 일부 중소기업에게 대출을 거절했다가 '당국에 고발하겠다'는 폭언까지 들었던 직원이 있다"고 말했다.

신용등급이 낮은 중소기업들이 자본시장에서 회사채나 기업어음(CP)을 발행해 직접 자금을 조달하기도 쉽지 않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1~8월 BBB등급 이하 회사채 발행은 전체 회사채의 16.4%를 차지했지만 9월에는 5.3%로 급감했다.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회사의 회사채 발행이 막힌 것이다.

●말보다는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놔야 할 때

금융권의 건전성이 낮아지면 실물 경제도 타격을 받는다. 금융기관의 자금 공급 기능이 마비되면 기업에 돈이 돌지 않아 설비 투자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금융기관이 중소기업과 가계의 대출 회수에 나서면 연체율이 늘고 다시 금융기관의 부실이 커져 실물 경제를 옥죄는 악순환도 우려된다.

경제 전문가들은 은행들이 '비 올때 우산을 뺏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은행의 자본 확충과 기업의 직접 자금 조달을 돕는 후속 대책을 주문하고 있다.

기업은행이 최근 지점장의 경영평가 항목에 중기 대출을 가계대출 실적의 2배까지 확대한 것도 정부가 1조 원 증자를 결정, 대출 여력이 늘어 가능했다.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기업은행 증자나 건설사 지원대책의 신속한 집행이 필요하다"며 "한국은행이 은행채 매입 규모를 확대하고 연기금과 함께 은행의 후순위채나 중소기업이 발행한 회사채 등을 매입을 통해 자금 공급을 확충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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