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펀드, 저무는 ‘황금광 시대’

  • 입력 2008년 3월 18일 02시 58분


《‘(자문으로 영입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존 메이저 전 영국 총리의 영향력도, 전설적인 경영능력의 소유자인 루이스 거스너 회장의 능력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화려한 인맥과 맨 파워는 오늘 이 회사가 처한 곤경을 해결하는 데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 최근 부도 위기에 놓인 칼라일캐피털에 대해 월스트리트저널이 내놓은 평가는 신랄했다. 칼라일캐피털은 지난주 채권단과의 자금 안정화 방안 합의에 실패한 뒤 사실상 청산작업에 들어간 상태. 글로벌 인수합병(M&A) 시장의 대표주자인 모기업 칼라일그룹이 받은 타격도 크다.》

차입금으로 ‘M&A 폭식’ 칼라일 등 유동성 위기

블랙스톤도 수익 80%이상 급감… 줄도산 눈앞

칼라일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와 경기침체가 확산되면서 큰손 사모펀드들이 잇따라 흔들리고 있다. 세계 M&A 시장이 얼어붙을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 보유자금의 수십 배 굴리다 위기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사모펀드의 성장세는 거침없었다. 수십 억 달러에 이르는 자금을 굴리면서 던킨도너츠 같은 식품업체부터 대규모 철강회사까지 업종을 불문하고 사들였다. 힐튼호텔과 크라이슬러 같은 굴지의 기업도 사모펀드의 손에 들어갔다.

가파른 성장세를 등에 업은 블랙스톤은 미국 사모펀드 최초로 뉴욕증권거래소에서 기업공개(IPO)에 나서면서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금융위기 파장이 확산되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시티그룹이나 메릴린치 같은 주요 채권단이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자금 회수 압박도 심해졌다. 이렇다 보니 차입금의 레버리지(지렛대) 효과를 바탕으로 투자규모를 불려오던 펀드들이 순식간에 청산 위기에 몰렸다.

이번에 문제가 된 칼라일캐피털은 지금까지 9억4000만 달러의 보유자금을 바탕으로 227억 달러 규모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운영해왔다. 실제 보유액보다 24배나 많은 차입금으로 펀드 규모를 키운 셈이다. 그러나 보유자산 규모가 급감하면서 불안해진 투자자들이 더 많은 담보를 요구하고 나섰고, 10억 달러에 이르는 마진콜(부족한 증거금 충당 요구)에 응하지 못한 칼라일은 결국 공중분해될 운명에 놓였다.

블랙스톤도 2007년 4분기에 1억7000만 달러의 적자를 냈다고 밝히면서 지난주 주가가 급락했다. 전년 같은 기간 11억8000만 달러의 순익을 낸 것과는 대조적인 성적표다. 수익규모는 지난해 4월 이후 연말까지 89%나 급감했다.

CNN머니는 “블랙스톤의 초라한 실적은 현재 사모펀드들이 직면한 불행의 한 사례일 뿐”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대형 펀드 운영업체인 드레이크매니지먼트는 자사 최대 헤지펀드의 청산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고, 런던에 본부를 둔 펠로턴파트너스와 모기지 투자업체 손버그 등도 줄줄이 청산 위기에 놓였다.

금융전문가들은 운영 실적이 공개되지 않은 대다수 사모펀드의 경우 상황은 더 나쁠 것이라고 추정했다.

○ “무차별 합병에 징벌 시작됐다”

칼라일그룹의 공동창업자인 데이비드 루빈스타인은 지난달 다보스포럼에서 “사모펀드의 황금시대는 갔다”고 말했다. “(무차별적 M&A에 대한) 속죄와 징벌의 시대(purgatory age)가 도래했다”는 말도 했다.

외신들도 ‘사모펀드들의 자산이 녹아내리고 있다’는 분석을 쏟아내고 있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은 사모펀드의 붕괴 속도가 무섭게 빨라지는 추세라며 “사모펀드에 이어 채권단인 은행의 부담이 커지고, 사모펀드가 사들인 기업들의 사정도 악화되는 연쇄적인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투기성이 높은 단기 투자를 해온 헤지펀드도 예외는 아니다. 비즈니스위크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이후 현재까지 최소 24개의 헤지펀드가 투자자들의 자금 인출을 제한 또는 중단했다. 천연가스 개발에 투자한 10억 달러 규모의 헤지펀드 자금 인출을 차단한 GPS파트너스는 최근 3개월 동안 수익이 15% 하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투자은행 베어스턴스의 유동성 위기까지 겹치면서 월가의 분위기는 더 험악해졌다. 베어스턴스는 지난해 모기지증권에 투자했던 헤지펀드 2개가 파산하면서 투자자들의 불안감을 촉발한 장본인. 최근의 유동성 위기에 대해서 지난주까지만 해도 “웃기는 헛소리”라고 부인하다가 결국 파산 위기를 시인해 신뢰도에 치명타를 입었다.

비즈니스위크는 “최근 일련의 사태로 헤지펀드의 연쇄 파산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자금시장이 얼어붙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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