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종별 입사선호 No2]<25>KT…검은 결재판서 메신저로

  • 입력 2007년 10월 27일 02시 58분


코멘트
‘거금도(居金島)의 맥가이버.’

전남 고흥반도 도양읍에서 남쪽으로 2.3km 떨어진 거금도에서 근무하는 KT 순천지사 고흥지점 소속 이종건(46) 대리의 별명이다.

자신의 업무인 통신 설비 관리를 하면서 틈틈이 주민들의 고장 난 가전제품을 수리해 주고 인터넷 교육도 해주기 때문이다. 그는 12년 전 거금도 발령을 받자 아내와 함께 이곳으로 이사를 와 아예 주민이 됐다.

KT는 “어지간한 규모의 유인도(有人島)에는 예외 없이 KT 직원이 일하고 있다. 수도권 아닌 지방 근무자가 1만7700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전국 방방곡곡 어디에나 국민의 이웃사촌처럼 존재하는 ‘유비쿼터스 기업’은 한국에서 KT가 유일하다는 것이다.

20, 30년 전까지만 해도 ‘전화=부(富)의 상징’이었다.

KT의 한 임원은 “그 시절에는 전화를 신청해 설치하는 일이 ‘내 집 마련’만큼 어려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전화 청약 우선순위 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이용만 할 수 있는 ‘청색전화’와 달리 타인에게 양도도 할 수 있는 ‘백색전화’는 거액의 웃돈을 받고 거래됐다.

당시 초등학교 운동회 때에는 ‘전화국장상’이란 표창도 있었다. 그만큼 KT 직원의 사회적 지위와 위세가 대단했다.

KT의 이런 위상은 시대가 바뀌면서 많이 약화됐지만 21세기의 KT맨들에게 ‘KT=한국 통신의 표준’이란 자부심은 여전히 대단하다.

기업고객본부 영업대표인 김종삼 과장은 “KT는 한국 통신산업의 영원한 맏형이다. 저 역시 ‘KT에서 통신을 담당하면 내가 한국의 표준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입사했다. 반도체는 삼성전자, 통신은 KT 아닌가”라고 말했다.

KT는 최근 한 취업 사이트가 조사한 ‘경력 쌓기 좋은 첫 직장’에 삼성전자 포스코의 뒤를 이어 3위에 뽑혔다.

KT의 평균 근속 연수는 18.6년으로 사실상의 평생직장이다.

삼성에서 최근 전직한 한 사원은 “KT에는 후배를 동생이나 조카처럼 아껴주는 가족 같은 문화가 있다. 경쟁이 치열한 일부 대기업에선 느끼지 못하는 따뜻함이 있어 좋다”고 했다.

‘KT가 아니라 한국통신(KT의 전신인 공기업)에 다니는 사람.’

KT 내에서는 공기업 시절 뿌리내린 권위적이고 공급자 중심의 사고를 하는 직장상사를 이렇게 꼬집어 부른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정치권의 입김을 통해 인사상 혜택을 보려는 사람도 같은 핀잔을 듣는다.

올해는 KT 민영화 5번째 해, 회사 시스템은 눈부신 속도로 변모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보고 시스템의 변화다.

입사 12년차인 한 과장은 “‘공무원스러움’의 상징인 검은색 결재판이 완전히 사라졌다. 2003년부터 사내 업무용 메신저 시스템을 운용하면서 평균 일주일 넘게 걸리던 결재 시간이 1시간 이내로 줄었다”고 말했다.

특히 한국통신 때는 사장에게 직접 보고하려면 시간 잡는 데만 열흘 정도 걸렸는데 지금은 메신저와 e메일을 이용해 1차 보고뿐 아니라 수정 보고까지 한나절이면 끝난다.

남중수 KT 사장은 가끔 메신저를 통해 “점심 약속 없는 사람, 밥 같이 먹읍시다”라고 ‘번개 모임’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직의 깊은 속까지 민영화된 것은 아닌 듯하다.

사내 메신저 시스템에 대해서도 “팀장이 직원들의 출퇴근을 원격 감시하는 것 같아 불쾌하다”는 반응이 있다. 그래서 몇몇 사원은 ‘일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PC를 끄지 않고 퇴근하기도 한다. ‘공기업스러운’ 도덕적 해이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KT맨들의 머릿속에도 과거에 대한 애착과 미래에 대한 도전이 혼재돼 있다.

2004년 직원 2483명을 대상으로 ‘KT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를 조사한 결과 1위는 역사와 전통(50.2%)이었지만 2, 3위는 첨단과 전문기술(29.3%), 변화와 혁신(9.0%)이었다.

지난해 봄 남 사장이 강원도의 한 지사를 방문했는데, 그때 지사장은 지역 인사들과의 만찬 선약이 있었다.

남 사장은 “나는 지사 직원들과 저녁식사 할 테니 아무 걱정 말고 다녀오시라”고 했다. 그 지사장은 그날 지역 모임에서 “KT는 사장이 왔는데도 지사장이 이렇게 다른 곳에 와도 안 잘리느냐”며 격려성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남 사장은 당시 이 일화를 직원들에게 보내는 e메일에 소개하면서 “내 상사보다, 회사 사장보다 우리가 만나는 고객이 더 소중하고 높다”고 말했다.

그런 KT의 사옥 엘리베이터 안 모니터에서는 요즘 ‘당신은 누구를 위해 일합니까’라는 주제의 캠페인 화면이 하루 종일 반복 상영되고 있다.

‘식당을 청결하게 하라’는 주인의 지시가 내려지자 직원들은 손님은 아랑곳 않고 청소에만 열중하고 결국 화가 난 손님은 식당을 나가버리는 내용이다. 고객을 ‘귀찮은 민원인’ 정도로 여기는 공급자 중심의 사고를 비판한 것이다.

최고경영자(CEO)가 ‘사장보다도 고객을 더 중시하라’고 강조한 지 1년 반 가까이 지났지만 ‘고객 경영’에 대한 인식 제고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한 팀장은 “각종 회의나 토론에서 ‘이것은 고객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 지루했던 논쟁이 순식간에 정리될 정도로 고객 중심 사고가 깊어졌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KT는 공기업’이라고 답한 국민이 무려 65%에 달하자 KT 임직원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KT는 그 원인 제공자가 바로 자신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올해 8월 민영화 5주년 기념식에서 남 사장 이하 임직원은 이렇게 다짐했다.

“고객에게 가치를 제공할 수 없는 일은 과감히 버리자. 그것이 KT적인 것이라고 해도….”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김용석 기자 nex@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