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中日 해외원조 전쟁]“차관 줄게 사업 다오”…생존게임

  • 입력 2007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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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가 277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해 포스코건설에서 사업권을 따낸 캄보디아 프놈펜의 국립직업훈련원 공사 현장. 이처럼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는 자국 기업의 현지 진출에 영향을 미친다. 사진 제공 재정경제부
한국 정부가 2770만 달러의 차관을 제공해 포스코건설에서 사업권을 따낸 캄보디아 프놈펜의 국립직업훈련원 공사 현장. 이처럼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는 자국 기업의 현지 진출에 영향을 미친다. 사진 제공 재정경제부
2003년 12월 터키 정부는 수도 앙카라와 교외를 잇는 통근 철도에 투입할 전동차 96량을 구매하기로 하고 국제 입찰 공고를 냈다.

일본 중국 프랑스 등의 전동차 제조업체 8개사가 경합에 뛰어들었다. 이들의 손에는 하나 같이 ‘저(低)금리 차관’이라는 ‘선물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현대·기아자동차그룹 계열사인 로템도 도전장을 냈다. 해외에 전동차를 판매한 경험이 많지 않던 로템은 상대적으로 약자였다.

해외 유상원조를 주관하는 한국수출입은행이 ‘지원사격’에 나섰다.

한국이 다른 경쟁국을 따돌리기 위해 선택한 수단은 일본과의 ‘합종연횡’. 수출입은행은 한국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5000만 달러와 일본국제협력은행(JBIC)의 4400만 달러 등을 합해 총 1억 달러 수준의 차관을 터키에 제공하기로 했다.

결국 사업권은 지난해 2월 한일 합작인 ‘로템-미쓰이 상사 컨소시엄’에 돌아갔다.

한중일 3개국이 세계 곳곳에서 ‘해외 원조 전쟁’을 벌이고 있다. 경제력이 뒤떨어지는 후진국에 ‘장기 저리’의 차관을 빌려 주거나 대가 없이 돈을 지원하려는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

이를 통해 원조 공여국은 후진국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는 대의명분과 경제적 실리(實利)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 해외시장 개척의 초석 ‘원조 전쟁’

2000년 미얀마의 전력 사정은 전후(戰後) 한국의 1950년대와 비슷했다. 부촌(富村)을 제외하고는 하루에 2, 3시간씩 제한적으로 전기가 들어오는 곳이 많았다.

한국의 무상원조를 맡고 있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은 미얀마 정부에 전력 산업에 대한 무상 컨설팅을 해 주기로 하고 한국전력공사를 통해 2001년부터 284만 달러를 투입해 미얀마의 전력 산업 진단과 송전망 설계를 해 줬다.

한국은 왜 이런 ‘공짜’ 서비스를 한 것일까. 2005년 3월 미얀마 정부는 한전에 미얀마 중심부를 관통하는 420km의 송전망 사업을 맡아 달라고 제안했다. 최종결정을 위해 협의 중인 이 사업의 규모는 2억5000만 달러.

당초 경제적,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 업체에 사업권이 돌아갈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지만 한전의 ‘무료’ 컨설팅이 결국 한국 기업의 수주 가능성을 높인 것이다.

이승우 산업자원부 유전개발팀장은 “한전의 무상 지원이 지난달 대우인터내셔널의 미얀마 광구 확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처럼 세계 각국이 유·무상의 공적개발원조(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경쟁을 벌이는 것은 ‘인도적인 동기’ 때문만이 아니다. 원조 공여국 소속 기업의 해외 진출 기회를 늘리면서, 자국이 개발한 각종 ‘시스템’을 깔아 해당 국가에 대한 장기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 한중일 원조전쟁 격화

자원 빈국(貧國)인 한중일 동북아 3국에 해외 원조는 에너지 및 광물 자원을 미리 확보하기 위한 ‘생존 게임’의 의미가 있다.

특히 무역의존도가 70%를 넘고 이 중 절반 이상이 개발도상국과의 거래에서 발생하는 한국은 개도국에 대한 원조가 지속적 경제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유럽 선진국이 장악한 아프리카, 미국의 영향력이 큰 중동과 중남미 등 세계 주요 지역이 ‘선점된’ 상황에서 3국은 주로 아시아 지역에서 원조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의 해외 원조는 일본, 중국에 비해 열세를 보이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실탄’ 부족.

2005년 한국의 연간 해외원조 규모는 7억5200만 달러로 국민총소득(GNI) 대비 0.1% 수준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같은 해 131억100만 달러의 해외 원조를 했으며, GNI 대비 비율은 0.28%였다.

중국은 해외 원조 규모를 공표하지 않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등지에서 50억 달러 정도의 자금을 원조에 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원조의 ‘성격’ 논란

올해는 한국이 해외 원조를 하기 시작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은 1987년 처음으로 수출입은행에 EDCF를 조성해 해외 원조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원조를 ‘투자’로 보지 않고 ‘퍼 주기’로만 생각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는 점은 문제로 지적된다.

원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일부 시민단체들은 경제적 동기가 깔린 ‘구속성(Tied) 원조’를 줄이고 조건 없는 ‘비구속성(Untied) 원조’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통일 변수’ 때문에 중장기적으로 막대한 해외 원조 수요가 남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송경순(경제학) 교수는 “주는 나라와 받는 나라 모두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원조 전략’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 한국의 원조수혜 경험

한국은 331억 달러 차관으로 고속성장

미국은 냉전체제하 자유진영 결속 다져

한국이 해외 유상차관을 받아
진행한 주요 인프라 사업
분야주요 사업 및 차관 지원국
교통경부고속도로(일본), 경인고속도로(아시아개발은행·ADB), 남해교(일본), 원주∼문막 국도(세계은행)
항만묵호항(사우디아라비아), 인천항(ADB), 부산항(세계은행)
소양강·대청·충주·합천·주암댐(일본), 안동댐(ADB)
발전부산·군산·영남·서울화력발전소(미국), 월성원자력발전소(캐나다)
기타포항제철 공장(일본)
괄호 안은 차관 지원국가 또는 기관. 자료: 재정경제부

‘포항제철(현 포스코), 경부고속도로, 서울시 지하철, 소양강댐, 서울대병원….’

각 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이들 시설물의 공통점은 모두 해외 원조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해외 원조자금은 한국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고통과 폐허’를 딛고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이 1945년 광복 이후 1999년까지 들여온 유·무상 차관은 모두 331억 달러에 이른다. 이 중 무상 원조는 69억 달러(21%)이고, 나머지 262억 달러는 유상 원조였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1960년 이전까지는 6·25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생 구호를 위해 식량 의복 연료 의약품 등 생필품과 원자재를 주로 무상원조로 받았다. 이 당시 해외 원조는 한국의 경상 국내총생산(GDP)의 8%대를 차지했다.

1960년대 이후 해외 원조는 주로 유상 차관으로 바뀌고 액수도 늘면서 본격적으로 투자에 활용됐다.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등도 이 시기에 지어졌다. 특히 이때 해외 원조는 개발투자사업으로 직접 투입되는 ‘프로젝트 원조’ 비중이 80%를 차지할 정도로 투자 재원의 핵심이었다.

한편 대(對)한국 원조를 주도한 미국 일본 등이 얻은 것도 적지 않았다.

최대 원조국이었던 미국은 대대적인 한국 원조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체제하에서 당시 소련의 태평양권 진출을 억제해 자유진영의 결속을 다질 수 있었다. 또 자국산 제품 수출은 물론 식량 원조를 통해 미국 내 잉여 농산물을 소화하는 부수익도 얻었다.

일본도 원조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대한 부분 배상 및 양국 간 국교 정상화 시기를 앞당길 수 있었다는 평가가 많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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