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도 증시도 ‘그림의 떡’…비명속의 中企들

  • 입력 2005년 10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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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에서 기업금융(IB)이 얼마나 발달했느냐는 그 나라 경제가 얼마나 역동적인가, 얼마나 야성미(野性美)가 넘치는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지표다.” 굿모닝신한증권 김학균 연구원의 말이다. 진취적인 경제구조를 갖고 있는 국가에서는 기업이 투자에 적극 나서 신천지를 개척한다. 국민은 은행과 증시 등을 통해 활발하게 기업에 자금을 공급해 준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 이후 이런 진취성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망하는 기업들이 생기면서 지나치게 위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는 것. 기업도 ‘안전한 경영’을 최우선으로 하고 금융권도 안전한 곳만 찾아 자금을 공급했다. 한국 경제가 안전만을 추구하는 조로(早老)현상을 겪는 것도 기업금융 침체로부터 출발했다는 진단이 적지 않다.》

○ 퇴보하는 기업금융

금융은 크게 소비자금융과 기업금융으로 나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소비자금융이 발전하고 있는 반면 기업금융은 정체 내지 퇴보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 말 현재 은행권의 가계대출 규모는 298조6392억 원으로 기업대출 규모(271조4563억 원·47.6%)보다 크다.

1998년만 해도 가계대출은 전체 대출 가운데 27.7%에 머물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격차가 계속 줄더니 올해 6월 급기야 가계대출이 기업대출보다 많아졌다.

증권 쪽도 마찬가지다. 자산관리, 주식중개 등 소비자금융 부문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지만 기업금융은 가장 낙후한 분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윤이 많이 남는 기업의 자금 컨설팅 및 관리 분야는 외국계 증권사가 독식하고 있다. 인수합병(M&A) 분야에서는 삼성증권(9위)만이 겨우 15위권 안에 포진해 있을 정도다.

메리츠증권 박석현 연구원은 “기업금융을 잘하려면 기업의 자금을 총체적으로 관리해 본 경험이 있어야 하는데 국내 증권사는 그런 경험이 없다”고 진단했다.

○ 돈줄이 막혔다

현재 국내에서 설비투자에 힘을 쏟는 기업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들이다. 그러나 이들 기업은 현금이 남아돌기 때문에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이유가 없다.

반면 정작 돈이 필요한 기업들은 돈줄을 찾지 못하고 있다.

특히 본보 설문에 참가한 코스닥 등록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은행권이 기업의 실력을 믿고 돈을 빌려 주는 신용대출을 너무 소홀히 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중소기업 대출의 연체율은 2002년 이후 2%대, 부도율도 0.02∼0.04% 수준으로 안정적이다. 하지만 올해 기업은행이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중소 제조업체의 30%가 자금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고 답했다.

직접금융 시장도 마찬가지다.

증시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지만 기업공개와 유상증자 등 증시를 통한 자금 조달 실적은 올해 들어 9월 말까지 2조9147억 원에 그쳤다. 이는 2000년(12조9143억 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것이며 지난해(6조3412억 원)보다도 크게 적은 금액이다.

증시에는 기업의 장기 비전보다 단기 주가 급등을 노리는 투자자가 아직 많은 편이다. 이 때문에 올해 코스닥시장에서 이뤄진 유상증자 가운데 상당수가 투기성 재료로 주가가 급등한 바이오 기업에 집중돼 있다. 게다가 올해 코스닥시장이 분식회계와 횡령 등으로 얼룩지면서 투자는 더 위축되고 있다.

○ “금융이 변해야 경제가 변한다”

금융 시스템이 소비자금융뿐 아니라 기업금융 분야에서도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먼저 금융권이 변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정부의 강도 높은 부동산대책으로 주택담보대출로는 더는 돈을 벌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따라서 금융권은 대기업 대출이나 담보 위주의 대출을 지양하고, 위험이 있지만 투자할 만한 유망한 중소기업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

증권사도 자산관리나 주식중개 일변도의 경영에서 탈피해 다양한 기업금융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

정부도 ‘동북아 금융허브’ 같은 구호성 발전 대책보다는 금융 시스템이 기업 경영에 직접 도움을 줄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화증권 최현재 연구원은 “정부, 금융권, 기업, 투자자 모두 신천지를 개척하겠다는 진취적인 생각으로 투자에 나서야 금융 시스템이 제 기능을 하고 경제도 활기를 띨 것”이라고 말했다.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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