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디자이너, 백화점에 떴다

  • 입력 2005년 10월 6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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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월 롯데백화점 신용호 여성의류 바이어는 ‘경쟁사에 없는 새로운 브랜드를 발굴하라’는 지시를 받고 고민에 빠졌다. 며칠 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해답을 찾았다.

청담동은 20, 30대 ‘감성 소비자’들이 새롭고 기발한 디자인에 이끌려 자주 찾는 곳. 주류(主流)에는 속하지 못하지만 감각과 디자인 하나로 생명력을 이어 가는 ‘언더그라운드 디자인 파워’의 산실이다.

국내외 유명 브랜드만 입점시켜 온 백화점들이 이런 무명 디자이너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유명 패션업체들이 오랜 경기불황으로 새 브랜드를 내놓지 못하는 데다 수입 브랜드만으로는 매장을 채울 수 없어서다.

신 씨는 “무명이지만 실력을 갖춘 디자이너들의 제품은 변덕스러운 고객의 소비 심리를 자극하는 비장의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언더그라운드 디자인 파워가 뜬다

올 6월 롯데백화점은 바이어들이 발품을 팔면서 발굴한 구두 디자이너 이보현 씨의 ‘수콤마보니’와 이재민 씨의 ‘더 슈’ 매장을 백화점에서 목 좋은 자리로 꼽히는 에스컬레이터 옆에 뒀다.


월 매출이 1억6000여만 원으로 이전에 그 자리에 있던 유명 의류브랜드 매출과 엇비슷하다.

현대백화점은 작년 9월 신진 디자이너 10여 명을 모아 서울 신촌점에 25평 규모의 의류매장 ‘C-컨셉’을 열고,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이는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달 18∼23일에는 서울대 의류학과 교수와 학생들이 준비한 패션 작품을 매장에서 전시하고 판매한다.

갤러리아백화점은 다양한 여성의류 브랜드를 모아 놓은 매장 ‘G.D.S’를 신진 디자이너의 등용문으로 활용하고 있다. 백화점이 판매사원, 재고관리, 마케팅을 맡고 디자이너는 상품을 공급하는 방식이다. 올 3월부터는 무명 디자이너에게 3개월간 판매 기회를 주는 ‘G.D.S 포캐스팅’을 시행하고 있다. ‘애브노말’, ‘보라’ 등은 이 방식을 통해 인기를 얻은 무명 디자이너의 의류 브랜드.

현대백화점 이화영 여성캐주얼패션 바이어는 “디자이너들은 백화점 판매를 통해 브랜드를 알리고, 백화점은 다른 곳엔 없는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 ‘나만의 디자인을 입는다’

1970, 1980년대는 서울 중구 명동의 디자이너 양장점이 유행을 이끌었고, 1990년대는 유명 브랜드 제품이 패션을 창출했다. 유명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제품이 단연 인기를 끌었다.

최근엔 젊은 층을 중심으로 대중적인 로고와 디자인을 거부하는 ‘노노스(Nonos·No logo No design)’ 성향이 급속히 퍼지고 있다.

익숙한 브랜드보다 독특한 디자인의 옷과 액세서리를 선호하는 것. 백화점들이 국내외 유명 브랜드에서 무명 디자이너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이유다. 롯데백화점 정지은 여성캐주얼패션 바이어는 “요즘 젊은이들은 ‘브랜드 제품이네’라는 말보다 ‘어디서 샀니?’라는 품평을 더 듣고 싶어 한다”고 귀띔했다.

백화점들이 국내 유명 브랜드와 값비싼 수입 디자이너 브랜드의 틈새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언더그라운드 디자이너들을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삼성패션연구원 최윤정 연구원은 “인터넷을 통해 얻은 세계 곳곳의 트렌드 정보에 그들만의 독특한 감각을 덧칠하면서 언더그라운드 디자이너들의 디자인 경쟁력이 높아졌다”며 “이들의 제품은 희소성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의 욕구와도 맞아떨어진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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