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위기를 신뢰구축의 기회로=현대자동차의 중국 내 합작법인인 베이징현대차는 중국 진출 2년 반 만에 기존 1위였던 폴크스바겐과 판매대수 1, 2위를 다투고 있다. 올해 1∼2월에는 베이징 시내 택시 공급을 거의 ‘싹쓸이’했다.
약진의 배경에는 높은 품질, 가격경쟁력과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2003년 4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이 발생했을 때 베이징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 기업의 주재원들은 집 밖에 나서지 않았고 일부 기업은 철수까지 고려했다.
그러나 현대차는 전혀 다르게 대응했다. “외신에 보도된 것만큼 위험하지 않다”는 보고를 받은 본사는 기존 주재원 60여 명 외에 출장직원 30명을 추가로 파견해 영업을 강화했다. ‘베이징 시 사스퇴치 대책본부’에는 차량을 기증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서구 언론이 사스의 위험성을 과장한다’고 불만을 가졌던 중국 정부와 베이징 시는 현대차를 모범사례로 높이 평가했다”면서 “이때 얻은 신뢰가 정부의 영향력이 큰 중국시장에서 현대차가 도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BMW는 한국의 외환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활용한 대표적 외국기업이다.
1996년 1만315대였던 한국의 수입차 판매대수는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 8136대, 이듬해인 1998년 2075대로 급감했다. 많은 수입차 업체들이 달러당 원화 환율이 폭등(원화가치 폭락)하자 지사를 철수하거나 판촉 활동을 포기했다.
하지만 BMW 본사는 한국 측 딜러에게 연 5%의 낮은 금리로 2000만 달러를 빌려줘 판매망을 유지하도록 했다. 시중금리가 20%를 웃돌던 상황에서 파격적 지원이었다. 중소 딜러들의 대금입금 시한도 연장해 줬다. 외환위기 이전까지 수입차 업계 순위 2∼5위에 머물던 BMW는 1999년 수입차 업계 1위로 뛰어올랐다.
▽장기적 신뢰가 성공의 비결=LG전자는 1997년 3000만 달러를 들여 브라질 법인을 세웠다. 그러나 포화상태였던 브라질 가전시장은 일본 한국 업체들의 가격인하 경쟁까지 겹쳐 채산성이 급격히 악화됐다. 1999년 1월 브라질이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들어가 일주일 만에 통화가치가 80% 하락하자 샤프, 산요 등 시장을 주도했던 일본 업체들은 서둘러 빠져나갔다.
브라질의 경기침체는 2003년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LG전자는 미국 전자업체가 스폰서를 포기한 상파울루축구클럽(SPFC) 후원을 자청해 ‘지역밀착 경영’에 나섰다. 이후 ‘엘리제(LG의 브라질어 발음)’ 브랜드의 인기는 급격히 높아졌다. 현재 LG전자는 브라질의 TV, 휴대전화, DVD플레이어 시장에서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옛 소련 붕괴로 정부 지원이 끊어져 어려움을 겪던 러시아 모스크바시의 ‘볼쇼이 극장’을 1991년부터 15년째 후원해 왔다. 러시아인들의 사랑을 받는 문화공간을 후원한 노력으로 삼성전자는 지난해 러시아인이 가장 신뢰하는 브랜드로 선정됐다. 삼성전자 휴대전화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러시아시장 1위로 올라섰다.
이들 기업의 성공은 고객, 지역사회, 거래업체와 맺은 ‘관계’를 중시하며 장기적 신뢰를 쌓아올린 ‘관계 마케팅’의 승리로 분석된다.
최근 ‘전략적 관계 마케팅’이라는 책을 펴낸 연세대 경영학과 이동진(李東振) 교수는 “사회적 변동이 큰 신흥시장에서는 고객과 맺은 신뢰의 수준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한다”면서 “해외 진출 한국기업들은 더욱 ‘관계 마케팅’에 역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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