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신치영]“지분공개 꼭 해야 했습니까”

  • 입력 2004년 12월 28일 17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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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 정부과천청사 브리핑룸. 공정거래위원회가 자산 2조 원이 넘는 국내 51개 기업집단의 ‘지분구조 매트릭스’를 처음으로 발표했다.

공정위가 내놓은 B4용지 220쪽 분량의 책자에는 51개 그룹 781개 사의 ‘지분 족보’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분석 결과의 핵심은 “대기업집단 총수와 일가가 얼마 안되는 지분을 가지고 계열사간 순환출자를 통해 그룹 전체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정위 당국자들은 발표가 불러올 파장을 의식한 듯 “기업들이 공시를 해 온 내용이기 때문에 별로 새로울 게 없다”며 이번 자료 공개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기도 했다.

한국 경제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기업지배구조의 투명성이 더 개선돼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 반(反)기업정서를 부추길 수 있는 지분구조를 공개해야만 했느냐’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가뜩이나 국내 기업들은 금융계열사의 의결권 제한 등으로 경영권 위협에 노출돼 있다. 기업의 투자 의욕도 살아나지 않아 경기회복도 늦어지고 있다. 이런 마당에 기업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외국 자본 등에 ‘친절하게’ 대주주 지분이 낮은 기업들에 대한 정보를 정부가 낱낱이 공개할 필요가 과연 있는 것일까. 일각에서는 공정위가 굳이 ‘지분 족보 공개’를 강행한 것은 대기업 정책과 관련해 ‘인민재판식’으로 재계를 압박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도 없지 않다.

과거에 총수의 지배력을 문제 삼으며 지분 분산을 요구했던 정부가 이제 와서 ‘총수가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문제’라고 몰아붙이는 것도 재계를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기업 관계자들은 “외환위기 후 ‘구조조정’과 ‘재무구조 개선’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정부의 대기업 정책으로 총수가 지분을 팔아 빚을 갚은 일도 적지 않았다”고 전한다.

한 대기업 임원은 공정위 발표 후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부가 필요에 따라 다른 목소리로 기업을 코너에 몰아넣는다면 정부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신치영 경제부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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