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젠 미래를 말하자]정부 ‘NATO정책’ 되풀이… 투자의욕 실종

  • 입력 2004년 8월 11일 18시 49분


코멘트
한국 경제는 가진 능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틀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학 교수 출신인 서울대 정운찬(鄭雲燦) 총장은 지난달 대검찰청에서 열린 ‘대검찰청 포럼’의 연사로 초청돼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이렇게 진단했다.

정 총장은 한국 경제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소비진작, 투자확대, 수출호조 등을 들면서 이 가운데 현재와 미래를 위한 장기적인 해법으로 투자확대를 꼽았다.

하지만 투자의 주체인 기업인들을 만나보면 미래를 낙관하기 힘들다. 심지어 “지금 같은 한국 상황에서 기업을 하면 바보고, 더구나 투자를 늘리면 더 바보”라는 말도 심심찮게 나온다.

투자에 따른 수익을 기대하기 힘든 측면도 있지만 특히 최근 들어 두드러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반(反)시장경제적 분위기와 ‘가진 자에 대한 질시 심리’가 경제 심리를 더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확산되는 ‘경제의 내일’에 대한 비관론=요즘 들어 한국 경제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는 경제전문가가 부쩍 늘어났다. 무엇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투자가 급감하면서 성장잠재력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보통 경제는 ‘투자 증가→일자리 증가→소득 증가’의 선(善)순환 구조를 통해 성장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잠재성장률은 얼마나 될까. 정부는 아직까지 한국 경제의 잠재성장률을 5%대로 추산한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우리 경제가 중장기적으로 5%대의 잠재성장률을 달성하려면 총투자(설비투자+건설투자)증가율이 매년 6.5% 이상을 꾸준히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총투자증가율은 △2001년 ―0.2% △2002년 6.6% △2003년 3.6% △2004년 3.9%(KDI 추산) 등으로 6.5%보다 낮은 때가 많아지고 있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잠재성장률마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실제로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90년대 중반까지는 급성장하다가 이후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다.

▽왜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는가=투자가 살아나지 않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이 불확실성이 동반되는 과감한 투자를 꺼리고 확실한 수익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투자를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순수 경제적 분석’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런 요인이 핵심은 아니다. 말로는 투자활성화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투자를 어렵게 하는 정부 여당의 정책과 경제관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제로 기업현장에서 나오는 불만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현 정부의 행태와 관련해 자주 거론되는 ‘NATO(No Action Talk Only·행동하지 않고 말만 한다)’라는 말은 이를 잘 반영한다.

정부 여당은 다양한 정책을 내놓으면서도 재계가 줄기차게 요구하는 출자총액제한제도 철폐나 핵심적 규제완화에는 여전히 소극적이다. 집권세력 안에서는 이런 규제를 손질하려는 것을 ‘반개혁’으로 몰아붙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언뜻 보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시장경제 원리에 위반되는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에 여당이 집착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현 정권이 시장경제의 핵심인 사유재산권을 존중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도 적지 않다. 재산권이 위협당할 수 있다고 느끼는 사회에서 경제발전은 불가능하다는 게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소설가이자 경제평론가인 복거일(卜鉅一)씨는 “어느 사회가 경제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산권에 대한 존중이 가장 중요하다”며 “하지만 현재 집권세력의 정책기조는 ‘좋은 목적’을 위해서는 재산권을 무시할 수도 있다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와 함께 수도 이전 강행에서 나타나듯 자신들이 생각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비용-효과 분석’이나 여론의 반발도 무시하는 독선과 아집도 경제를 갉아먹는 요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최근 집권세력이 집요하게 관심을 쏟고 있는 ‘과거사 청산’ 구호 역시 정치적 목적 외에도 사회갈등 증폭을 통해 경제적 불안심리를 확산시킬 것이라는 지적도 많다.

▽올바른 비전 없이는 경제의 미래 없다=그동안 심각한 경제난을 인정하지 않거나 책임을 야당과 언론에 전가하던 정부 여당은 최근 경제난이 위험수위에 이르자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적자국채 발행 등을 통한 재정지출 확대에 나서겠다는 방침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국가재정을 더 어렵게 하는 ‘돈 풀기’만으로 한국 경제의 미래가 보장된다는 데 동의하는 경제전문가는 극히 드물다.

한양대 나성린(羅城麟) 교수는 “정부 여당이 재정지출 확대라는 단기부양책 카드를 고려하고 있지만 얼마나 효과를 볼지 의문”이라며 “정부가 일관성 있는 정책으로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고 기업과 국민의 불안한 심리를 제거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수희(李壽熙) 기업연구센터소장은 “현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는 어떤 때는 창업을 통한 투자활성화를 이야기했다가 또 어떤 때는 ‘개혁’을 이야기하는 등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다”며 “투자활성화를 위한 확실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만이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집권세력이 미래를 외면하는 ‘운동권적 사고’에서 벗어나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시장경제 원리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기업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만이 한국 경제의 추락을 막을 수 있는 근본적 해법이라고 강조한다.

특별취재팀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시장원리 존중해 선도기업 키워야”▼

21세기 세계 질서는 각국의 경제력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국익을 지키고 자존심을 유지하는 방법은 경제력과 국가경쟁력을 키우는 길밖에 없다.

지금 전 세계는 탈(脫)이념 실용주의노선으로 경제력 키우기 경쟁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시대착오적 이념과잉과 노선논쟁으로 공리공론에 빠져 있다. 국권을 상실했던 100년 전의 실패를 답습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라가 기울어져 가는 것을 보면서도 눈앞의 갈등과 고통이 두려워서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져 있다. 역사적으로 위대한 민족, 성공한 국가는 어려울 때일수록 힘든 선택과 결정을 스스로 내려 국가전략을 세우는 성숙한 국민의식과 의사 결정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권위주의적 인치(人治)’의 시대가 끝났다. 선진사회가 되려면 권위주의적 인치가 해체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빈 공간을 ‘민주적 법치(法治)’가 자리 잡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민주화의 이름으로 법의 권위와 법치질서마저 무시하는 무질서 상태로 가고 있다. 이것이 지금 한국병의 원인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통합과 희망의 리더십이다. 국가지도자부터 먼저 구체적이고 국민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는 희망과 국가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성공한 대한민국의 60년 역사를 부정하고 과거 지향적이고 내부지향적인 편가르기식 정략은 국가발전 전략이 아니다.

김종석 교수

지속적 경제발전을 위해서 과거 권위주의 정부가 했던 역할은 이제 기업과 시장에 넘겨야 한다. 정부가 반(反)기업정서 확산을 방조하거나 기업인의 창의를 억누르는 분위기를 만든다면 경제발전의 장애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21세기 국가간 경제력 키우기 경쟁에서 국가경쟁력은 기업으로부터 나온다. 특히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한국의 선도기업들이 바로 한국 국력의 상징이자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이들 기업이 한국을 초월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법적, 제도적인 뒷받침을 해야 한다.

김종석(金鍾奭·경제학) 홍익대 교수

★한국의 미래를 위한 독자 의견과 제보를 받습니다. 경제부 공종식 기자(kong@donga.com)나 박중현 기자(sanjuck@donga.com) 앞으로 보내시면 됩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